- Cacophony : Shuffle Cards
 
Hong Soo-yeon
 2016. 12. 12 - 2017. 1. 7

정해지지 않음의 권리

11월 11일, 작가와 내가 경기도 양주에 있는 그녀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동안 알고 지냈지만 그의 개인 공간에서 만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야기도 오래 했다. 그날 있었던 대화중에는 본인의 작업 특성상 평론가들이 글쓰기 힘들 거라는 말도 있었다. 이는 특별한 형상이나 서사를 본 딴 그림이 아닌 탓에, 가령 완성 과정이 품은 은밀함 이외의 다른 뭔가를 글로 풀어낼 게 없기 때문에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녀, 화가 홍수연에 관한 글을 쓰는 게 쉽다. 그림을 보는 내 주관성 속으로 침잠하게 만드는 작업은 그 전부를 파고 들어가는 것을 어느 선에서 가로막고 있다. 우리는 안다. 평론은 취조와 변호 끝에 나오는 판결문이 아니다. 또 그것은 밑바닥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자화자찬을 대필해놓은 글도 아니다. 다만 이 짧은 글에서 나는 홍수연 작가가 펼쳐놓은 회화에 접근하는 내 방법을 소개하고 싶다.

우리는 이 매혹적인 형상에 작가가 붙들려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짐작한다. 알 듯 모를 듯한 곡면체는 무작위(random)로 배열된 필연성으로 드러난다. 그림은 이와 같은 모순에 휩싸인 상호연관 속에 놓여있다. 내가 그녀의 그림을 설명할 때에 뚜렷한 형상을 갖추지 않은 몇 개의 원들이 겹쳐 있다는 표현을 종종 썼다. 이런 설명은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물 위에 띄어놓은 기름방울처럼 그들 형상과 여백은 뚜렷한 구분을 이루며, 그 대비야말로 한 편으로 보자면 미완성의 혐의까지 포용해야 하는 그녀의 회화를 완결 짓는 단서가 될 만하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지금 미술계에서 불고 있는 단색화 내지 모노크롬 계열에 포함될 만한 여러 작가의 작품들과 달리, 홍수연의 그림은 같은 도상이 반복되게 그려지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사각의 평면 속에서 입자들이 비슷한 위치와 방향을 채택한 흔적은 보인다. 그 점은 우리 눈으로 볼 때 가장 적절한 구도를 점유하는 법을 작가가 터득한 것일 뿐이지, 각각의 그림이 서로 관계되는 일도 없고, 심오한 주제를 내세우는 일도 없다. 이러한 사실이 단색화와 그녀의 그림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우리 미술계가 주목하는 작가 군 가운데에서 그녀의 이름이 빈번히 등장하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10년 동안 홍수연의 그림은 색이 절제되는 경향으로 점점 나아가고 있다. 이번에 재차 공개되는 드로잉 작업이 아예 흑백으로 이루어졌다는 점도 주목해보자.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작가에게 최근의 추상단색화 과열 현상을 의식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면, 그래도 아니라고 대답할 것 같긴 하다.

아무튼 그녀의 작업은 미술계 일반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을 따르는 것 같으면서도 동떨어진 지형에 있다. 각각의 그림들 또한 한 단계 상위체계인 화가의 의식, 그리고 단계를 더 넘은 상위체계인 미술계, 그리고 최상위체계인 사회와 문화, 그 각각의 수준 영역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무슨 말인가 하니까, 이 화가와 그림 사이에서 여러 이미지들이 따로 떨어져서 넘실댄다는 말이다. 예술과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말거나, 작가가 삶의 매 순간에서 무슨 희로애락에 창작의 동기를 기대거나 관계없이, 그림 속 이미지들은 자체적인 물성을 드러내고 있다. 캔버스 평면 위에 물감이 쌓이고 그것은 곧 평면에 가깝게 수렴된다. 말로 표현되기 힘든 색의 조합이 또 다른 물감 아래에 깔리기를 반복하고, 이로써 실체가 드러난 도형은 그리기와 기다리기라는 과정이 결합된다. 이는 마구잡이처럼 보이지만, 실은 매우 정돈된 필연성으로 완성된다.

그냥 단순하게 볼 때, 그녀의 그림은 아름답다. 나는 이 고유한 이미지가 화면의 바탕 위에 자기조직적인(self-organizational) 체계를 갖추면서 한 점의 미적 세계를 펼치는 순간을 목격한다. 어둠이 가득한 이 세상에 그녀의 그림이 환한 빛을 비출지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나. 그곳이 세상의 어둡거나 밝은 그 어떤 장소라도 상관없이 홍수연의 그림은 그곳으로 쉽사리 융화되지도 그렇다고 배척당하지도 않는다. 이 그림이 지닌 아름다움은 단순한 장식적 가치를 넘어서 바로 거기에 회화의 정해지지 않은 권리가 존재함을 몽상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해당한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