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칠
 
Lee Jin-yong
 2015. 4. 6 - 2015. 5. 16

5015.158.43

 

내가 작가 이진용의 존재를 제대로 알게 된 건 신문 덕분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선 후의 일이다. 그를 늦게 알았지만, 문화면에 크게 실린 이 유명 작가의 그림이 나에게는 훨씬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작품처럼 느껴졌다. 기사에 따르면, 극사실에 가깝게 묘사된 그의 회화는 풍경화나 정물화로 장르를 따지기에 앞서 어느 특정한 시기에 완성되었던 기법이나 예술가들을 오마쥬하는 것처럼 다뤄졌다. 조각에서부터 회화와 오브제 설치에 걸친 이진용의 미술이 대부분 그렇다. 그림 속에 담긴 대상은 과거의 빛을 다 빨아들여 시간의 지층을 켜켜이 쌓아올린 듯 어둠에 쌓여있다. 바로, 그가 그린 <책> 연작은 깨알 같은 글자와 이미지로 채워진 나머지 신문 지면을 압도했다. 정확하게는 중앙일보와 한겨레신문의 문화면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문에서 미술을 다루는 섹션은 문화면이다. 정치면이 있고 경제면도 있는데 예술면은 없다. 한국 사람들은 문화예술이라는 말을 잘 쓴다. 문화와 예술은 전혀 다른 뜻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이 합성어는 ‘과학기술’과도 같이 별 거리낌 없이 사용된다. 난 이따금 강의나 지면을 통해 이 점을 지적해왔다(근래 이야기를 꺼냈던 곳이 그 이름부터 문화예술론 특강.). 예술은 애당초 문화보다 몇 급 아래에 놓여있던 초라한 제도였다. 문화를 한자어 뜻 그대로 보자. 문화는 인류의 정신과 물질의 총체적인 가치를 글로 품는 과정이다. 예술이 종교나 과학처럼 문화의 자리에 끼일 여지를 마련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16,17세기의 일이다.

 

까마득한 옛날, 종교로부터 딴 살림을 차려나온 예술은 ‘미(美)’를 중심에 두고 일을 벌여왔다. ‘미’가 어떤 뜻을 품었든 그것은 형식의 문제로 정리되었다. 형식은 예술에서 특별하게 양식이란 말로도 같이 쓰이며 작품들을 구별하는 일을 맡았다. 이 일에 문자가 일치감치 끼어들었다. 사람들이 세계를 규정하려 할 때 필요했던 도구가 글자였으며, 페니키아에서 알파벳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기본적인 형태가 발견된 것과 중국에서 갑골문 이전에 도문이 식별 가능한 글자로 생겨난 게 기원전 3000년경이었다.

 

물론 이것은 문헌정보학이나 인류학에서 논쟁이 붙는 사안이다. 말을 기록할 수 있는 기호 형식으로 고정시키고 목록을 만드는 노력을 문자의 첫 단계로 볼 때 그렇다는 뜻이다. 문자의 초기 형태들은 그림과 당연히 연관될 수밖에 없다. 작가 이진용은 새로운 <활자 Type> 연작을 통하여 창의성의 규모를 먼 과거로 넓힌다. 그는 틀로 찍어낸 무수한 낱개를 하나씩 한지로 감싼 다음 붓으로 활자체를 그려나갔다. 이것이 조합되어 완성되는 타이프 시리즈는 한 명의 화가가 이루어 낼 수 있는 작업의 수고를 극단으로 밀고 나간다. 또한 이는 현재를 기준으로 기원전 3000년 전까지 걸친 5015년의 문화사에 자신의 작품을 공들여 재배치하고 ‘미’를 해석하는 준거가 된다.

 

활자 연작은 우리에게 작품 외적으로 또 다른 궁금함을 낳는다. 책이나 도자기와 같은 오브제를 화폭에 옮겨오던 종래의 작업과 새로운 작업은 어떻게 균형을 이루며 계속될 것인가? 이진용의 작업이 온당한 평가를 받기 시작했던 무렵의 작업에서 나는 예술이 문화로 승격하던 16,17세기의 서구 회화 양식을 엿본다. 이진용의 특별한 묘사력은 특히,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M. Caravaggio 1571-1610)의 사실적인 정물화에 기원을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만든다. 예컨대 <성(聖) 마태오의 순교>에서 관찰되는 명암의 강한 대조, 현실에서 이상을 그려내는 경지는 이진용이 재현하고자 하는 마니에리즘의 유미주의에 닿아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진용의 이번 전시에 관하여, 인류 문자의 기원처럼 중세 후반기 회화사의 연표를 두 번째 방점으로 찍긴 싫다. 작가의 태도는 그로부터 좀 더 미래에 맞춰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6세기와 17세기 예술은 미적인 요소에서 장식성을 예술의 본질에서 밀려난 것으로 깎아내렸다. 내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때의 예술 이론은 예컨대 개념(concetto)이나 착안(disegno) 혹은 명민함(acutezza) 같은 요소를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작가와 수용자의 취향 문제를 거쳐서, 나아가 ‘알 수 없는 어떤 것’(no so que)과 같이 신비적인 태도까지 끌어들였다. 지금 예술계에서도 빈번히 나타나는 “예술가의 혼” 따위 말이다. 중세 끝 무렵의 예술 철학은 그리스의 모방 원리(mimesis)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거기서 일탈하는 작동원리를 키워갔다. 바로 작가의 독창성과 혁신이다. 우리가 이진용의 작품에서 보는 감각은 현대적인 것이다.

 

현대(영어로 modern은 근대 혹은 현대 둘 다 바꾸어 쓸 수 있고,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이 둘은 따로 구분되는 것으로 곧잘 오용된다. 일단 여기서는 현대로 표기한다.)예술은 독창성과 혁신을 통해 예술가 개인의 권리를 새롭게 정의했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아닌 오직 이것’이 되었다. 이진용은 이 원칙을 따른다. 그것은 천재 개념이다. 샤를르 보들레르(Charles P. Baudelaire)가 처음으로 떠올린 천재 개념은 실은 궁색한 변명이다. 자신의 독창적인 작품 <악의 꽃>이 1857년에 출판되었지만 책이 팔리지 않자, 보들레르는 자신의 재능을 아는 이는 신과 본인뿐이라는 자기합리화로 위안 받으려 했다. 출발이 어찌 되었건 천재의 독창성은 혁신에 능수능란한 예술가 상을 이끌어냈고, 이는 마니에리즘 혹은 매너리즘으로 불리는 대가의 단순한 손놀림 이상의 무엇을 요구했다.

 

만약 이진용의 회화가 특정한 시기를 반복해서 불러내며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회고적 작업에 그쳤다면, 우리는 그의 미술을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로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이진용은 자신의 조형적 재능과 숙련성을 독창적인 프로젝트의 수단으로만 쓸 뿐이다. 예술의 역사가 곧 예술 수단의 역사가 된 이후, 현대 예술의 탄생으로 평가되는 <악의 꽃>의 출판년도 이후 지금껏 예술은 미/추의 구분 대신 새로움/낡음의 기준으로 재배치되었다. 158년이라는 압축된 현대 예술사를 조망해 온 이진용은 그리기나 만들기 행위의 완성을 넘어서 오로지 자신만이 세울 수 있는 단계로 접근하고 있다. 당사자에게 그 과업은 세울 수 있다기보다 세워야만 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진용의 작업은 일반적인 예술 동기론이 아니라 장 칼뱅(Jean Calvin)의 소명설에 근접한 교의로 해석해도 좋다. 이진용의 예술가 경력 43년은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고찰 처마 밑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닥의 돌을 파들어 가듯 영겁의 힘에 작품을 의탁하는 과정이다. 그의 새로운 작업은 이 과정을 가장 이상적으로 뽑아 낸 결과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