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칠
 
Hi, Rainbow
 2015. 3. 2 - 2015. 3. 21

안녕, 무지개

 

 지금까지 주류 미술계에 떠들썩한 노출을 피해오던 작가 정승혜의 신작이 발표되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가 제한된 상황에서 나온 작품들은 그럴만한 이유를 암호처럼 숨기고 있다. 우리가 그녀의 비밀스러운 기호를 단번에 해독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겉에 드러난 질서의 체계는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개별적인 작품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상태는 작가의 평소 삶의 재현이나 다름없다. 감각이 예사롭지 않고, 고집 세고, 이상적인 상태를 향해 행동하는 그런 삶 말이다.
 뭐, 써놓고 보니까 좋은 설명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렇지 않은 예술가가 어디 있나. 내 뻔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정승혜 자신의 독백을 새겨듣는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자신이 지금껏 평범한 삶 속에서 경험한 사건에서 이미지를 뽑아내어 왔다. 따라서 한 눈에 산뜻해 보이는 작품이 실은 마냥 좋은 기억에서만 비롯된 건 아니다. 거기엔 개인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예컨대 블루(blue)가 우울함을 뜻하듯,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 색깔은 우리 삶의 다양한 감정을 비유한다.


 내가 추측하는 바는 여기까지다. 그녀가 지내 온 삶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나는 작가의 시간과 공간에 개입하는 초대를 받지 못했다. 사실 그럴 기회가 없었다. 몇 해 전에 매우 인상적인 전시를 이끌어낸 박민영 선생이나 작가로서의 삶을 스스로 비추어 보여준 이명미 선생과는 달리, 나는 지금도 일종의 관찰자로서의 역할만 간신히 하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 그녀가 설파하는 작업 동기론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나는 이제 좀 더 진전된 해석을 요구하고 싶다. 내가 해석하고 싶은데 어려우면 딴 비평가가 해야 되고, 우선 작가 본인도 자기성찰을 곰곰이 하면 좋을 것이다. 그 일은 청년작가에서 기성작가로 이행되는 바로 지금 필요한 절차이다.


 작가의 일상을 담은 과정으로서의 작업이라는 언술도 이참에 바꾸고 싶다. 평소에 나는 예술 비평에서 현학적인 표현이나 기만적인 논리 전개를 매우 싫어한다. 여기서는 하고 싶다(그런데 나는 자신 없다). 단지 막연한 생각으로, 작가의 작업 수기가 단순히 일상의 경험에만 방점을 두고 스스로를 가두어 두는 건 옳지 않다. 일단 정리해 보면, 정승혜의 작업은 몇 가지 특별한 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손으로 그린 드로잉을 컴퓨터 포토샵으로 마무리하는 작업 과정이다. 둘째로 그 그림은 굵은 선으로 정리가 되고 있다. 셋째로 꽤나 암시적인 그림 속 기호들은 또한 역시 참신한 문장으로 된 제목이 따라 붙는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작업은 드로잉에서 출발하여 다른 매체 표현으로 옮겨갈 조건을 갖추었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평면 회화는 일체의 빈틈이 없이 컴퓨터 화면 위에서 구현된다. 색의 선택이 중요한데, 그 색상은 일반적인 회화가 가지는 붓놀림의 질감이 당연히 없으므로 한편으론 쌀쌀맞다. 이와 같은 디지털의 냉랭함을 덜어줄 수 있는 건 파스텔 조의 색상을 쓰는 일이다. 이 부드러운 색깔은 세상의 험악함을 달랜다. 작가가 삶의 흐름을 이 세상의 구체적인 대상에 빗대어 기록하고자 하는 희망은 예컨대 반 되스부르크(Theo Van Doesburg)의 색면 추상을 떠올리게끔 하는 구획(sector)의 아름다움으로 드러난다. 그녀 작업의 첫 단계에서 시작된 검은 테두리 선은 그 아름다움을 확정시키는 장치다. 그녀는 자신이 각각 쪼개어 재현하는 세계를 눈으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나보다.

 또한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이미지 속에서 작가가 스스로 대변인이 되어 이야기를 보충하는 노력이다. 각각의 작품이 품은 이야기는 형식적으로는 화자로서의 주체인 정승혜의 미시적인 역사 서술이며, 우리는 그 흔적을 되짚어 나가는 순례객의 태도를 취하게끔 되어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우리는 조금 안다.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게 유년기의 프로이트적 자아형성으로부터 비롯되었건, 에릭슨(Erik H. Erikson) 식으로 지금까지 온 삶에 거쳐 다듬어진 취향과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이건 간에 작가의 삶을 우리가 통찰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작가는 우리에게 강요 대신 부드럽게 권유한다. 관객의 눈에 보이는 것과 숨어있는 이야기, 그 사이의 빈틈은 뜬금없는 제목으로 메워진다.


 사물을 언어로 표현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상황과 동떨어진 것 같은 무심함, 동심이나 소녀감성이란 말로는 표현이 흡족할 수 없는, 좀 더 냉소적인 면까지 내비치는 문장의 인식은 작품의 이미지와 표제의 당위성 사이에서 탁구공처럼 왔다 갔다 한다. 이는 미술인 것과 미술이 아닌 것 사이의 서먹함을 없애고도 남는(따지고 보면, 그녀의 미술은 전통적인 미술과는 거의 결별했다) 이미지의 트랜스폼이다. 행여나 그것이 그림이 아니라 시가 되어도 좋다. 사진이나 영상 작업으로도 이미 나왔다. 실용적인 디자인이어도 나쁠 건 없고, 그 궁극적인 작업 방향이 건축으로 향한다는 인상은 나로선 지울 수 없다. 그래도 이끌림은 역시 드로잉이다. 그리고 이번에 전시 공간에 모습을 드러낸 인스톨레이션. 이 설치 작품은 작가가 완성한 드로잉 하나를 입체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시점이나 조건에 이르러서는 작가가 자신의 평면 작업을 다른 형식으로 모두 바꾸어 병렬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그 규모를 상상으로 헤아려보면 엄청난 기획이다. 만약 그날이 온다면, 삶의 어느 언덕 위에서 우리는 그녀가 드리워 놓은 무지개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윤규홍, 갤러리 분도 Art Director/예술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