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cophony : Shuffle Cards
 
Lee Jae-hyo
 2014. 5. 19 - 2014. 6. 14

조각으로 중재된 자연

지난 세기의 마지막 5년 사이에 이재효의 조각이 공개되었을 때, 적지 않은 비평가들과 수집가들은 그 작품의 전모에 깊이 놀랐다. ‘센세이션’이라는 외래어는 지금 내게 무척 상투적인 말로 느껴지지만, 그 당시에는 작가 이재효에게 곧잘 따라붙는 단어였다. 돌을 천장에 무수히 매달아 소나기처럼 허공을 뚫는 단자들의 설치, 통나무 둥치를 잘라 곡선과 직선의 예각을 살린 환조, 검게 탄 숯 위에 굵은 못이 엿가락처럼 휘어 타이포그래피처럼 박힌 조각들이 잇달아 발표되었다. 관객들은 조각이라는 장르 구분 아래에서 진행된, 당황스럽지만 동시에 완결미를 가진 작품들 앞에서 충격을 받았다. 그 작품들은 고전적인 조각의 요소들을 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들을 오만하게 무시하는 듯했다. 때로는 대지 예술 같기고 하고, 어떤 건 가구 같기도 한, 더러는 단색화를 연상시키는 작품들은 호불호의 논쟁 속에서 서서히 현대 미술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개념 작업이 지배하는 현대 미술의 경향과 다르게, 이재효의 조각은 겉으로 드러난 재료와 만드는 방법을 통해서 이제는 작업에 관한 설명이나 비평의 도움을 굳이 받지 않더라도 관객을 감탄시키고 있는 작품이 되었다. 이재효의 작업은 미술 평단에서 합의된 몇 가지 주석으로 참고하여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구체적 형태의 재현과 추상적인 양감의 창조라는, 사람들이 우리 조각에 관하여 막연하게 품고 있던 두 진영 이외에 또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작가가 작업 구상과 실행, 설치의 전 과정에 걸쳐 자연의 모사를 하며, 인위적인 부분(수작업과 더 나아가 예술제도)과 자연적인 부분(재료적 측면)의 균형을 적절히 맞추는 조정자라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의 작업이 한국적인 특성을 품은 결과라는 점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말을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없다.

이 가운데 한 가지, 자연과 예술의 관계는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는 이재효 조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조소가 자연에서 흙이나 돌이나 나무나 쇳덩어리를 가져와서 형상을 만들었으므로 자연의 일부라고 말하는 지나치게 일반화된 논리와 달리, 그의 참모습은 자연 경관의 변형된 형식으로 완성된다. 그건 사실이다. 여기에 대하여 인문사회과학을 끌어들이기 좋아하는 평론가라면 예컨대 하이데거나 전기 샤르트르의 철학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추상적인 이론으로 추상적인 예술 작품을 설명하더라도 그렇게 기술된 문장은 구체적인 형식으로 보상받으려 할 게 분명하다. 유감스럽게도, 이재효의 작업은 자연의 일부를 ‘지금 여기에’ 옮겨 놓았다는 현상학적 독해로 감상하면 심심하다.

자연의 일부를 포획하여 오는 방법이라면, 날 것 형태를 그대로 옮기는 조경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예술 체계의 핵심에서 비껴나간 조경술이 가진 순진함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포착되거나 변형된 자연은 오브제 식으로 자연적 산물을 디오라마로 완성시킨 갖가지 범작에서 흔히 발견된다. 좀 더 정직하게 생각해보자. 나무 합판으로 조립된 탁자나 흙과 잔디로 다진 야구장이 예술이 아니고, 이재효의 작업이 예술인 이유를 그동안의 해석을 통해서 바라보면 세밀하게 걸러지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조각가 이재효의 작업에 관하여 아직 우리 생각이 미치지 못한 부분은 무엇인가. 내 생각에 그것은 변형된 자연도 아니고, 옮겨놓은 자연도 아니라, 수집된 자연의 사체 그 자체다. 내가 몇 년 동안 그의 작품을 보면서 느껴왔던 까닭 없는 섬뜩함 혹은 숭엄함은 이를테면 ‘작가가 쏟아 부은 열정이나 작품에 서린 에너지’와 같이 계량적으로 측정이 어려운 레토릭의 찬사로 이해될 가치가 아니다. 그의 작업은 적절히 가공된 자연적 소재 선택도 아니라 예전에는 자연이라고 불리던 개체들의 훼손에 가깝다. 그의 작품에는 야생성이 엿보인다. 야생성이 동물이 아닌 식물이나 광물에도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재효의 조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전시 <조각으로 중재된 자연>에서 또한 이재효는 본인이 일궈놓은 작품의 숭엄미를 보존하는 일에 성공했다. 생명이 다한 잔해를 통하여 그 전생을 담았던 누리를 표현하면서, 더구나 혐오 대신 미적인 형태를 갖추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을 현대 예술 이론이 지정하는 어느 좌표에 둘 것인지 안팎의 물음에 대답을 강요받고 있다. 자전거를 처음 탈 때 균형을 대신 잡아주던 도움의 손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홀로 가는 모습은 그처럼 성공한 작가와 비평가의 관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작업을 예술 이론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의 작품에는 현대 미술이 부딪히고 있는 생생한 논쟁거리가 많이 있다. 그리고 그 논의는 아직 텍스트로 다듬어지지 않은 채 시각적인 매혹의 영역 속에서 숨어있다. 그의 작품이 미술계를 요동치게 한 이래, 이처럼 통제된 형태의 연작들과 더불어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지점으로 우리는 찾아 간다. 그 길에 대한 이정표가 현재로서는 <조각으로 중재된 자연>인 셈이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