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cophony : Shuffle Cards
 
Yang Yoo-yun
 2013. 7. 1 - 2013. 7. 27

가득한 밤

대대로 전해 온 우리 그림이 한국화라는 장르로 매겨지면서, 다시 말해 서구에서 탄생한 예술 개념 속으로 제도화되면서 그 정체성을 보장받기 위한 현대적인 기법 응용은 이제 흔한 것이 되었다. 현대미술 속에 자리 잡은 한국화를 기성 작가들과 젊은 작가들이 생각하는 방식은 다르다. 한국화와 서양화, 어른과 젊은이로 가로세로를 나눈 네 개의 영역 한 쪽에 화가 양유연을 집어넣는 것은 꽤나 단순한 관찰이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다. 다만 몇 개의 인구통계학적 변수, 예컨대 성별, 출생 거주지, 소득, 출신학교 등을 추가해서 살펴보면 한 작가가 가지는 배경에 관한 사회학적인 탐구가 가능하다. 나는 이런 연구를 좋아한다.

서울에서 자라나서 생활해 온 신예 한국화가 양유연의 통계적 속성 가운데 연령 변수와 성별(gender) 변수는 그녀의 작품과 가장 큰 연관성을 맺는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지도교수로부터 상속된 상징 자본이나 문화 자본과는 별개다. 작가의 성장 배경이 이끈 감수성은 학제 과정의 수련과 어우러져 이중의 자산이 되었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 속에서 그 세대의 아픔을 새겨 넣는다. 이 주제가 진정한 통각으로 우리를 찌르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녀의 재능은 ‘나는 아프다’는 칭얼거림조차도 일종의 고전적 회화미를 품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가 가지는 ‘자괴감, 박탈감, 불안함, 의심, 슬픔, 불편함’은 장지에 머금은 채색만큼이나 넌지시 제시될 뿐이지, 결코 프로파간다처럼 곧장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작품을 보면 그녀가 무슨 고민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것들을 혐오하는지 알게 된다.

다시 통계적 변수 이야기. 유일무이한 예술 세계를 하나의 범주로 구분해 파악하려는 사회학의 불경스러움은 의외로 효율적인 태도다. 양유연이 위치한 범주는 한국의 문화예술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소구력을 가진 집단이다. 이십대 후반부터 삼십대 중반에 걸쳐있고, 대도시에서 성장하고,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 세대가 없다면 우리나라 공연예술계와 출판계는 흥할 수 없다. 작가가 인정하든 안하든 그녀의 작업에는 이들 집단의 감수성이 들어있다. 나는 그녀의 그림을 보면서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두려움과 떨림>, 로만 보랭제가 주연한 영화 <미나 타넨바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멜랑콜리아>, 록밴드 스웨터의 노래 <생채기>가 함께 떠올랐다. 이삼십 대의 우울이 젊음의 특권이라면, 또한 예술가가 지닌 특권이 더해져 의미심장한 문화적 입지를 마련한다. 양유연 같은 젊은 여성 작가의 등장은 예술의 수용자 집단으로 한정되던 세대가 비로소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현상으로 풀이하면 된다.

한 집단의 정체성이 개별화된 형태로 뻗어나간 경우가 예술 취향(가장 동질적인 패턴을 따르는 것은 정치적 성향)이라고 한다면, 나는 양유연의 작품을 둘러싼 작가와 애호가들의 취향에서 일종의 희망을 찾는다. 나는 그녀의 회화가 표현하는 핏빛을 머금은 상처, 텁텁한 연기, 그리고 후줄근히 낡은 건물과 그보다 더 오래되고 불길한 달 그 모두를 존중한다. 그림에는 그것들이 모여서 이루는 <가득한 밤>의 거대한 수수게끼가 펼쳐진다. 이것은 시간의 문제다. 원래 물리적 시간과 생물적 기억은 서로를 밀어내려고 하는 법이지만, 작가는 시간과 기억이라는 극과 극의 자기장이 둘러 쳐진 곳에 밤하늘의 별과도 같은 광경을 무수히 뿌려놓았다. 작가는 지금 여기 현실 속으로 불러올 수도 없고, 불러오기도 꺼려지는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을 허구로 채워 놓았다. 그 허구적 이미지는 예컨대 본인 자화상이 아닌 다른 사람의 그것으로 곧잘 대체된다.

정신의학에서는 치료의 효용성이 거의 없어졌지만 문예이론에서는 지금도 꾸준히 선호되는 게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심리학이다. 양유연의 작품을 잠재의식에 대한 방어기제의 징후로 보는 관점도 그녀를 둘러싼 진지한 말과 글을 할 때 계속 오르락내리락 할 것이다. 비록 나는 정신분석학의 가정을 따르지 않고, 대신 생물 인지학에서 발전한 급진적 구성주의 이론으로 작품 관찰 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다음에 누군가가 양유연의 작품론을 쓸 때 프로이트의 투사(projection) 개념을 끌어들여도 무난할 듯하다. 투사는 자신의 숨겨진 욕망이나 결점을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고 들추어내는 방어기제다. 작가는 자신에게 남겨진 기억과 환상을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 태연스레 빗대어 고백한다. 일찍이 그녀가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로부터 달(月)에 관한 매혹을 공감했다면, 이 또한 달빛에 감춰진 표면의 크레이터가 작가의 상흔과 닮은 시각적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작가가 가진 기억력-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기억하는 힘은 그녀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끔 하는 끈기를 제공한다. 지금 한국미술계가 이 작가를 주목하는 이유도 선천적인 재능이나 개념 설정보다 끈질긴 태도에 더 닿아있다. 이 바쁜 세상에 우리 모두가 굳이 한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눈여겨 엿볼 여유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렇지만 작가가 이처럼 간절하고도 꾸준히 날 선 표현을 하는 곡절은 있을 것이고, 우리가 그 흔적의 기록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충분하다. 현대미술의 이해 공동체 안에 속한 우리 앞에 작가는 관객의 시선을 이끄는 힘을 가졌다. 지나치게 수줍어하고, 동시에 성실한 그림이다. 그녀의 기억은 지워져도 작품은 남는다. 그래서 자기순환적인 질문은 끝까지 남아있다. 작가는 기억을 지우기 위해 그리는 것일까, 아니면 기억을 남기기 위해 그리는 것일까?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