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cophony XIV
 
Luy Jae-Ha - media Installation
 2006. 11. 20 - 12. 8

편집과 기억  


짙은 색 나무로 제작된 경대 모니터의 작품에서부터, 작가 류재하는 ‘천지창조’의 공간을암시하는 영상 프로젝션, 사각의 조형성을 강조한 입방체 콜라주 회화와 자투리진 작은 영상을 교차시키는 비디오 설치 작업 등으로 다양한 조형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기에서, 가구에 모니터가 설치된 작품은 조각-공예적인 물체와 이미지들이 환영적이며 비물리적인 대립 구조로 콜라주의 조형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대-모니터의 연합은 환영의 이미지와 실제이미지가 연합되어, ‘더한다’ 또는 ‘덧붙인다’라는 의미를 제시한다. 실제와 가상공간의 덧붙여지듯 전개되는 조형성에 더하여, ‘오랜 시간’이 흐른 듯, 손 떼 묻은 짙은 색으로 다듬어진 공간 속에서, 모니터의 다양한 불빛과영상은 시간의 간격을 만들어 놓는다.


작가 류재하 가 직접 손으로 정성스럽게 만든 경대는 오랫동안 숙련된 ‘장인’의 솜씨를 연상하게 하고, 과거 어머니들이 썼던 경대와유사한 모습에서 우리를 지난 시간으로 여행을 떠나게 한다.  따뜻한 봄 볕 아래, 분칠하시는 어머님의 화사한 모습을 지켜보며, 아이였던 관람자들은 작품에 골치 아픈 개념으로 다가서기보다는 편안하고 행복한 추억을 머금어내는 것 같다. 작가는 이렇듯, 관람자에게는 자신의 경험에기초한 추억과 향수를 섞어 놓는다. 디지털 경대 화면 속에 펼쳐지는 영상은 선들이 겹쳐지거나 생선과 동물들이 다양하게 몽타주되고 있다. 이러한 두개의 단상, ‘가구’와영상들은 서로 다른 ‘조형성’을 연합시키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 역시 화면의 몽타주 작업처럼, 실제 조형적인 공간의 몽타주의 제시로 진행된다. 이러한 화면은 과거 기억과 현재의 유희적인 사유를 이어주며, 촉각적인 유물(경대)과 가시적인 환영(모니터)의 변화를 이뤄낸다. 디지털 영상이 자유로운 소묘 같이, 단절되면서도 연속적으로 전개될 때, 선과 오브제들은 방임적이며 파편적으로 때로는 무질서하게 편집된다. 여기서, 마리-클레르 로빠르의 ‘무질서’로서의 몽타주와 그것의조형성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다. 몽타주에 의해 형성된 기억과 의식의물질성은 무질서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그의 몽타주는 작가의 기억과 연관된 단서를 "기술하는 몽타주"라 할 수 있다.


그의 편집은 다르게 보면, ‘조각 내고 (편), 모으는 (집)’ 행위로서, 정황을 새롭게 엮어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러한 몽타주의 측면에서 아이젠스타인(Eisentein)을 생각한다. 아이젠스타인에게는 몽따쥐라는 것은 일종의 "분절된 담론"처럼 구성되는 것으로서 작품에있어서의 구성을 목적으로 하는 도구로서 이해되었다. 이러한 단위는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것의 대조를 위한 대위법과도 같다. 이는 작가의 영상과 소리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구와 영상 사이의 관계에서도 나타나는 중요한 축이다. 이것은 "이미지’와 소리처럼, 모든 파라메터들 사이에 일반화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이 경대가 진짜 가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경대의 서랍 밑은 뚫려 있거나 열리지않는 서랍모양의 사각형만 있어서,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가구였다. 이 오브제를 통해서, 작가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 
여기서 플라톤의 생각을 빌어서 ‘가짜’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한다. 플라톤은 ‘가짜’나 ‘잘못된 것’이 의식의 부족한 부분(공화국II 382b)이면서도 구체적인 존재에 반대된다(플라톤, 히피아스366b)고 지적하며, ‘무’(不-存在)로 연관시킨다. 이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존재의 또 다른 형태이며, 가짜 (잘못된 것)는 실제가 아닌 다른 존재이다. 즉, 사실이 아닌 또 다른 사실, 기억의 사실이며, 이 가짜 경대는 다른 사실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러한 ‘가짜’라는 것은 ‘거울’과모니터의 관계이다. 거울은 여러 상징적인 의미가많은데, 나르시스 내지는 세계 존재에 대한 반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존재에 대한 반영과 반성은, 작은 개인의 기억들을 제시하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거울을 통한 기억과 회귀는 멀티미디어 조건 속에 따뜻한 인간성을 담아내는 그릇처럼 보인다. 

 

강 태성 (미술비평, 조형예술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