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cophony : Shuffle Cards
 
Kim Seung-young - WALKING IN MY MEMORY
 2012. 9. 20 - 2012. 10. 20

WALKING IN MY MEMORY

“기억이란 우리들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기억하는 것이다.”(옥타비오 파스)
 
 살다보면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잊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도 저도 아니지만 다만 지금의 사정상 기억 속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다. 조각가 권진규(1922-1973)는 아끼던 여자 제자나 주변 여인들의 모습을 작품으로 옮기고 <순아>, <경자>, <혜정>, <예선>과 같은 각각의 그녀들 이름을 제목으로 붙였다. 록밴드 토토(Toto)는 유난히 여자 이름을 제목으로 딴 노래가 많은데, , , , , 와 같은 그 곡들은 멤버들이 지금껏 사랑해왔던 여자들의 이름이라고 한다. 여기, 작가 김승영은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조각으로, 그림으로 드러내지 않고, 단지 그들의 이름만을 늘어놓는다. 참 간단하다. 하지만 쉽지 않다. 작가는 이것을 놀라울만한 계획으로 매번 다른 형식으로 표현하다. 내가 옆에서 보기에, 이 작업은 물량과 시간과의 싸움이다.     
  
 한 개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의 총합이라는 가정에서 김승영의 미술이 시작된다. 이와 같은 현상학적 존재론은 예컨대 전화번호부에 저장해놓은 사람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맺은 친한 사람들의 명단만으로 그 사람의 직업이나 신분, 취향과 같은 정체성을 대강 알 수 있는 현실에 비추어 설명할 수 있다. 작가는 이와 같은 자신의 생각을 사진, 조각, 평면, 영상, 오브제 설치라는 형식을 빌어서 표현한다.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마주치게 되는 조각 연작은 떨어지는 물방울이 일으키는 아름다운 파문을 형상화하고 있다. 찰나의 인지는 동심원의 물결을 만들며 동시에 단단히 굳어있다. 물 위의 작은 요동 앞에 관객은 딱딱한 기억의 깊숙한 밑을 파헤칠 준비를 한다. 옆에 있는 캄캄한 방을 비추는 세 줄기의 빛은 금이 간 비석 형상을 비추는 램프와 LCD 모니터다. 비석을 암시하는 듯한 검은 돌 조각, 그리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촬영한 영상 작업은 한 개체의 죽음 이후 그에 대한 망각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실존의 가능성으로 대치된 예술의 언술(Memento Mori!)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거대한 비석 모노리스(Monolith)를 연상시키는 검은 조형물은 갤러리 공간을 두 쪽으로 나눌 듯이 가로막고 서있다. 음악가 오윤석이 작업한 사운드가 깔리는 가운데, 여기에는 작가가 기억하는 중요한 이름들이 영화 엔딩 크레딧처럼, 혹은 폭포수처럼 내려와서 아래에 수조 속에 잠긴다. 그 낱낱의 이름들이 이뤄내는 스펙터클은 다른 어떤 이름들로 대신 바꾸어 놓더라도 장식적인 면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남들이 볼 때엔 그냥 이름일 수 있지만, 그 이름의 주인공들은 작가에게 있어서 곧 자신과 같으며, 그들 대부분은 지금 현대 미술계의 최전선에 위치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 사회로부터 격리된 현대 예술은 그 이름들을 특별하지 않는 작가 개인의 기억으로만 냉담하게 가둔다. 
    
 그리고 벽돌작업. 이름 작업의 기본적인 틀을 쉽게 이해하게끔 하는 평면 작품을 옆에 두고 무수히 깔린 벽돌은 우리를 경탄스러움과 애틋함으로 몰아간다. 여기에는 작가 본인의 온갖 감정이 그 제공자 역할을 한 이들의 명단과 함께 새겨져 있다. 이름과 느낌이라는 고유명사와 일반명사, 그리고 함축된 문장이 새겨진 벽돌들의 위치는 무작위로 결정된 건 아닐 것이다. 이것도 각각의 뜻을 품고 있다. 어떤 이름은 깨끗한 벽돌에, 또 다른 이름은 낡아서 금이 가고 색 바랜 벽돌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김승영 작업의 이미지를 파란 색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작업에서 그는 노란 색에 닿아 있다. 엘튼 존 의 무의식적인 연상일 것 같지는 않지만, 노란 색으로 바뀐 환경은 벽돌 하나하나마다 그 빛을 스며들게끔 한다. 기억이라는 필름의 몇 층 뒤에 가려진 기억은 노란 색에 의해 아련한 과거를 벽돌의 틈마다 피어 오른 이끼와 함께 전한다.

 과거를 매개하는 노랑 혹은 주황빛은 오래되어 변색된 옛 사진에서도 볼 수 있는 톤이다. 작가는 동시대의 몇몇 회화에서도 발견되는 이 시각적 은유를 이번 전시에서 끌어 썼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한 개인의 온전한 죽음은 사후 남아있는 가족사진에서 망자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모두 세상을 떠난 다음에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했다. 역사에 남을 위인들의 얼굴이야 다음 세대 사람들도 기억할 것이므로, 김현의 말은 매우 소시민적인 정서를 반영한다. 나는 김승영의 미술을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서는 김현의 소시민적 문학론의 테두리와 겹친다고 생각한다. 그는 거창하고 무거운 담론 대신, 사소한 인간관계에 시선을 둔다. <문학과 지성>으로 대표되는 문단을 배경으로 한 소시민적 문학론이 <창작과 비평>을 중심으로 한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과 맞서던 시기를 지나면서, 서구 인문사회과학계의 포스트(post)논쟁이 수입되어 들어왔고, 미술 이론 역시 순발력있게 “포스트 민중미술”이라는 개념을 생산해냈다. 김승영의 미술 또한 포스트 민중미술이 진화된 패턴으로 볼 수도 있다.


 나는 ‘포스트’가 이전 개념과 이후 개념을 완벽히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 원 개념을 더 진지하게 계승하는 본다. 그 내용이란 비판을 비판하는 태도에 있다. 메타비평과도 같은 맥락에 있는 이 태도와 구분되게 단절된 것은 형식적인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1990년대 문학계에서 소시민이 하나의 계급인가 아닌가라는 문제를 미술에 그대로 적용해서, 과연 현대미술가들이 하나의 공통된 집단으로서 뚜렷한 목소리를 내는가에 관해 살펴볼 수도 있다. 예술가는 자본과 권력에 박해까지는 아니더라도 묘한 긴장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계급의식을 김승영 작가도 가지고 있다.   
     
 미술 이론과 교육 현장에서 그 흐름을 읽어내는 가장 흔하고 안일한 관점이 해체주의다. 현대 미술의 정황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읽어내면 편하긴 한데, 이 관점으로는 김승영의 작품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작가의 작품에는 주체가 훼손되거나 상실되어 해체된 게 아니라 훨씬 적극적이고 일관되게 드러나 있다. ‘나’를 빼면 김승영의 작품은 성립되지 않는다. 노란 벽돌길 위를 산책하든, 잔잔한 물결이 이는 수면을 유영하든 그 모든 주체는 기억하는 ‘나’가 있어야 한다. 작가는 자신을 포함한 주변 예술가들을 평범한 소시민으로 인지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스스로를 고양된 기예와 정신의 결정체로 인식한다면, 작품의 구성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거창한 예술 역사의 계보를 보여주면서 그 가운데 본인의 좌표를 찍어 넣을 것이다. 김승영은 미술과 자기 자신 사이를 잇는 관계, 일상에서는 숨겨놓은 격정어린 심정을 세상에 펼쳐 보이려는 야심, 이 두 가지를 혁신적인 작업에 담아놓고 있다. 최근작 또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스타일의 전형이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


시공(時空)을 초월해 소통을 꿈꾸는 <기억의 단편들> - 김승영의 작업세계

작가 김승영은 <소통(communication)>과 <기억(memory)>이라는 테마를 인스털레이션이나 사이트 스페시픽작업(site specific work)으로 연출해왔다.    
숲에서 거두어 온 무수한 낙엽들로 전시장을 메우고 그 한가운데에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연출하는 전시공간. 작가개인의 삶을 공유하거나 스쳐간 인명들이 자막으로 흘러가는 영상....
그의 작품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찰라적 만남과 기다림, 망각과 기억 속에 위치한 살아있는 존재들의 의미를 생생하게 연출한다. 과거와 현재, 물질과  영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고정 관념화 된 경계를 허물고 時ㆍ空間의 접점과 미끄러짐 사이에서 눈과 귀와 촉각과 후각의 감응기재가 온전히 작동하여 세계와 만나게 되는 희열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그의 작품에 초대받은 관객은 물질과 물질의 찰라적 만남과 기다림, 미끄러짐 사이의 여백과 여운에서 존재들의 내밀하고 근원적 가치들과 대화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어떻게 세계를 바라볼 것인가를 제시하는 미술의 지표를 넘어 어떻게 하나의 사물이 일상의 문맥에서 벗어나  art의 차원으로 진입하는 지, 또 그 art가 우리의 삶에 있어 어떠한 기능과 가치로 작동하는 지를 자명하게 드러내 준다.

 일상의 상품이나 사물을 미술담론(discourse)의 장(field)에 들여와 본래의 문맥을 비틀거나 잘라내어, 현대미술의 계보를 형성해 온 것은 다다이스트와 쉬르리얼리스트, 팝아티스트 들 사이에서 흔하게 채용되어 온 기법이다. 그들의 작업에 관류되고 있는 수법은 일상의 관용화 된 산물들-당대의 신지식과 신기술에 의한 산업사회의 레디메이드-을 담론의 미디어로 차용하여 죠크나 냉소적 패러디를 부가하는 지극히 인위적인 충격효과를 발신하는데 목표를 맞추고 있다. 그것은 서구의 이성중심적 가치관에 기초한 미술담론의 장에서 형성된 진보주의 미술사관의 성과들이었다.

 그러나 김승영의 일상으로부터의 변용과 새로운 차원의 연출효과는 그것들과 부분적으로는 세계를 공유하면서도 근원적으로는 지평을 달리한다.

 그의 작업은 소비 산업자본주의 산물을 차용하더라도 그 산업사회의 일상적 표피나 관용구만을 빌려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 차용된 일상은 도시생활에서의 일상을 빌려오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일탈하고자 찾아 간 고즈넉한 산사에서나 문득 발견하게 되는 생명의 비의(秘意)와 문화적 자취들을 불러 들인다. 바위틈새에서 자라나고 있는 이름 모를 초목들이나 풀벌레들의 존재에서 발견하는 신선한 생명의 존엄성과 존재의 불가사의, 유적들의 잔허(殘墟)가 환기 시켜주는 인간 삶의 자취나 문화적 기억들의 무게와 의미들을 소생시켜 주는 것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의 명징함과 처마 끝 풍경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려준다. 거기에는 도시의 바쁜 일상과 기계소음 속에 잊혀지고 소모되고 희미해져 가는 우리의 지각기재들- 우리의 눈과, 귀와 촉각과 후각- 을 다시 건강하게 소생시켜주는 마술이 펼쳐지고 있다. 그것은 시각적 진실이나 미술이란 존재의 물질적 규명에만 몰두하던 근대미술담론이나, 온전한 감각기재의 균형을 되살려줄 것으로 기대했던 마샬ㆍ맥루언 식의 전자기술시대에 안이하게 편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김승영의 작품세계에는 문명과 자연, 이성과 감성, 이지와 지각세계가 분별되기 이전의 근원적인 존재의 이법과 지혜에 눈뜨게 하는 현자의 메타포가 빛나고 있다.

김영순

 

 

나타남과 사라짐 – 병리와 자기 치유의 흔적

"본다는 것은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의 이름을 잊는다는 것이다." - 폴 발레리(Paul Valéry)

 존재한다는 것은, 내 눈 앞의 것들과 끊임 없이 소통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무언가를 바라보는 순간, 그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인식과 선입견, 지식 등은 구체적인 경험의 기억으로 변화하게 된다.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이었던 폴 발레리가 말한 ‘이름을 잊는다는 것’은 내가 본다는 행동을 하기 이전에 이성의 영역에 있던 관념들을 ‘보다’라는 소통의 과정을 거쳐 상처나 추억과 같은 내재화된 감성의 영역으로 옮겨 놓는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바라봄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소멸과 생성, 그리고 감정의 개입 등은 김승영의 작품에 개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김승영의 작품들은 대부분 명상적인 분위기와 세련된 형식미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러한 분위기는 그가 일관되게 유지하는 몇 가지 요소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김승영의 작품이 가진 가장 주요한 형식적 특징으로 세 가지 정도를 거론할 수 있겠다.

 공간에 놓여진 작품과 그로 인해 형성되는 빈 공간의 환기된 분위기가 적절히 혼재되어 생명력을 부여 받은 환경을 구축해왔다는 것은 김승영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는 작품이 놓여진 공간의 에너지를 관객으로 하여금 충분히 호흡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하는데, 그러한 형식적 지향점과 공간 해석의 스케일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깊은 생각을 유도하게 만들곤 했다. 작품 속의 일정한 공간에는 내부로 관객이 들어가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관객이 (적극적인 참여든, 어색한 머뭇거림이든) 함께 존재할 때 온전히 성립하게 되는 것들이다. 
 
 김승영 작품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형식적인 특징은 반복의 미학이다. 낙엽이나 빈 책장, 자신의 얼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 등 각 작품에 존재하는 개체들은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어 어떠한 집적(集積)의 형태를 이루며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특징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결국 지리멸렬한 반복의 연속이라는 감상적 체험의 결과를 보여줌과 동시에 시간이나 사물을 관조하고 해석하는 작가적 사고가 상당히 다차원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감지되는 형식미는 대개 목재나 낙엽, 물 등의 자연물을 이용한 재료로부터 시작하는데, 그 중에서도 물은 상당수의 김승영의 작품에 등장하는 중요한 재료이다. 그는 1980년대 후반에 처음으로 물을 작품의 재료로 쓰기 시작했는데, ‘작업을 하면 할 수록 예술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젊은 김승영에게 최소한의 환경만을 조성해주면 미세한 감각까지 구현해 내는 물이라는 재료의 발견은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자생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언제 어디서건 스스로의 내용을 담고 있는 유기체로서, 물은 그의 여러 작품에서 매우 긴요하게 사용되었다. 고여있는 물이 반영하는 공간, 낙수(落水)가 표면에 만들어내는 물결,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소리와 흔들리는 영상 등은 그의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요소이다.

 김승영이 작업을 통해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소통’과 ‘기억’에 관한 것이다. 김승영은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신앙에서 비롯된 도덕적인 결벽증으로 인하여 자기 비판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스스로 받은 상처와 열등감은 타인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시도하기보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이해되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게 만들었고, 이는 성장기의 김승영에게 트라우마였다. 원활하지 않은 소통에 대한 절망과 받아들이기 힘든 상처의 기억들은 김승영의 감수성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한동안 그의 작업은 어두운 심상에 대한 투쟁과 내적 트라우마의 치유의 방편으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1999년 원서갤러리에서의 개인전을 준비할 당시, 가까운 두 명의 지인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 김승영은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 그 위를 흰색으로 덮어 버리는 작업을 시도했다. 칠하면 드러나고, 그 위를 다시 칠하면 또 드러나는 얼굴은 결국 희미한 흔적으로 남게 되었고, 그는 그 결과물을 전시했다. 완전히 지우고 싶은 기억들도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덮어 버리는 것일 뿐이며, 결국 흔적이 되어 남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2000년경 뉴욕의 P.S.1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1년간 참여한 김승영은 언어와 관습의 장벽으로부터 느껴지는 고립감과 지극히 제한적인 소통의 상황을 체험하게 된다. 외부와의 단절로 인한 여파는 자신의 내적 정체성이 무너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적극적인 소통에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겪어야 했던 심리적인 위축은, 후에 자신의 얼굴 이미지를 안경 쓴 눈만 동그랗게 남긴 채 잔뜩 위축되어 돌돌 말려있는 형상으로 재현한 작품으로 표현되었다. 이 때의 기억은 2007년 겨울에 발표한 ‘세상의 꽃’이라는 작품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최근 작가교류프로그램으로 몽골에서 체류를 했던 김승영은 말이 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편안한 소통을 즐겼고, 후각이 결합된,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안고 돌아왔다고 말했는데, 이는 십 수 년간의 작품활동을 통해 그가 구축해 놓은 소통의 방법론이 가져온 결과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번 개인전에서 김승영은 오브제와 물, 그리고 벽돌 위에 붙인 수많은 이름들로 이루어진 설치 작품 ‘흔적’(2008)과 싱글채널 영상작품 ‘기억’(2008)을 출품하였다. ‘흔적’은 공간화랑 전체 면적에 걸쳐 배치된 장소특정적 설치작품이다. 전시장의 천정에 매달린 오브제는 마이미스트들이 언어를 배제하고 종이로 행위로 소통을 시도하며 연출을 구상하던 자리에 김승영이 우연히 참여하면서 아이디어를 얻은 작품이다. 그는 몇 명의 사람을 모아 넓은 종이를 매개로 한 자유로운 행위로 서로에게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서 자신과 상대방의 더듬이를 맞대고 비비는 행위로 서로의 기억을 교환하는 개미들의 소통을 연상하게 하는 이 행위의 결과로 김승영은 소통의 흔적이 남은 종이들을 얻게 된다. 그것들을 이어 붙여 커다란 오브제 형태로 만들어서 전시장에 매달아 놓음으로써, 그는 우연성에 기초한 소통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재현해 놓았다.

 오브제 아래에 언뜻 심연(深淵)처럼 자리 잡은 물은 오브제와 그 배경을 은은하게 반영하고 있다. 위쪽에 있는 유리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햇빛의 각도가 변하면서 매 시간 다른 분위기의 공간을 반영하는 물은 명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공간의 차원을 확장시킨다.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소통을 하게 함으로써 진지한 사고의 모멘텀을 가질 수 있게 한다. 그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생각보다 큰 소리를 내며 물 위에 비친 영상에 잔잔한 파문(波紋)을 만들어낸다. 

 전시장의 입구부터 내부 깊은 곳까지, 수많은 이름들이 박혀 있다. 작가가 그 동안 살아오면서 기억 속에 들어온 사람들의 이름을 공간화랑의 내부에 있는 각각의 벽돌 위에 투명한 글씨로 붙여 놓은 것들이다. 긴 시간의 흔적이 드러나는 벽돌 위의 이름들은 어떤 것은 선명하게, 어떤 것은 오랜 시간 벽돌과 함께 닳고 지워진 듯 존재하는데, 마치 여러 차원들의 시간이 남긴 흔적들이 중첩되어 있는 것 같다. 차원의 통로를 부유하는 기억의 편린들을 은은하게 재현해 놓은 이 이름들을 김승영의 기억을 통해 만들어진 하나의 소우주(小宇宙)로 읽을 수 있다면, 이 소우주의 흔적 속에 존재하게 된 관객은 그 흔적들로부터 궤도가 다른 자신만의 소우주를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각자의 소우주들이 서로 얽히고 겹쳐져 서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한 순간이 우주의 삼라만상과 맞닿아 있다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의 가르침을 상기하게 한다.

 소극장 공간사랑에는 영상작품 ‘기억’(2008)이 상영되고 있다. 화면은 깔끔한 스크린이 아니라 투박한 벽돌 면 위에 투사되는데, 자신의 윤곽이 그림자처럼 드리운 벽면 위에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이름들이 장식적인 요소 없이 그저 지나간다. 마치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감도는 적막한 분위기도 있지만, 작곡가 오윤석이 작업한 서정적인 음악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차분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으로 이끈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철학자 니체의 ‘자기 변혁을 통한 초인화의 과정’을 미술의 치유적인 과정과 연결시키며 아방가르드 미술의 정신적 기원을 분석한 사람으로 미국의 미술비평가 도널드 쿠스핏(Donald Kuspit)이 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삶의 고통에서 해방되고자 했던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초월성에 의한 의지가 예술작품의 치유적 속성을 긍정하고, 자발성과 종합성, 변화에의 의지, 현실과 예술적 감수성의 조화 같은 미학적 균형을 추구했다고 주장했다. 

 서정성과 명상적 분위기를 추구하는 형식미, 기억과 소통과 같은 정신적 요소를 일관되게 지향하는 김승영의 작가적 정체성에서 동시대 대중이 열광하는 자극적, 물신적 트렌드를 찾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예술을 수단으로 사회적인 명성과 부를 추구하는 천박성’ 대신에 예술의 치유적인 실천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타인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는 예술론으로 무장한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충만한 의지와 함께, 동시대의 병리적 현상에 대한 깊은 감정이입과 실천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고원석 (공간화랑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