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칠
 
Jung Byung-guk
 2012. 5. 1 - 2012. 5. 26

짙은 그림자


 예술 비평은 평론가가 작가나 작품을 잘 안다는 전제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자기 안목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비평에 임한다. 그런데 어떡하나. 나는 작가 정병국의 그림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 뭔가 알 것 같기도 한데, 모르겠다. 내가 평론가라는 신분으로 그의 작품을 처음 비평했던 때가 10년이 더 된 과거가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모르긴 매 한 가지다. 그때는 내가 풋내기라서 그랬다 치고, 지금은 뭔가? 분명히 문제가 있다.


 발전 없는 내 안목이 문제인 건 확실한데, 이 ‘문제’가 작가에게는 없을까? 나는 있다고 본다. 정병국의 회화에는 미세한 결핍이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는 회화 플레임 안에 포함된(포함되어야 할) 모든 대상을 어느 선까지만 재현한다. 재현된 대상들은 너무나도 확정적인 실존이다. 예컨대 ‘도대체 이게 뭘 그린 그림일까?’란 물음은 필요 없는 대신, ‘뜬금없이 왜 이걸 그렸을까?’라는 물음만 존재한다. 말하자면 확정된 우연성이다. 눈앞에 생생한 우연은 작가 개인의 지난 기억을 상징하는 푸른 빛 배경과 어울려 매혹적인 빛을 발한다. 나는 그 빛을 글이라는 언어 체계로 바꾸어 기술해야 한다. 그게 어렵다. 물에 물 탄 것 같은 얼버무림, 혹은 현학적인 자세로 스스로를 숨기는 비평 대신, 그의 그림처럼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물론 ‘문제’를 요령껏 감당하여 잘 풀어낼 큐레이터와 평론가가 그의 주변에는 있다. 나는 그 큐레이터처럼 작품 설치 공간을 한 치도 빈틈없이 궁리해 낼 감각도 없고, 그 평론가처럼 작품 의미를 정확하고도 우아하게 짚어 낼 글 솜씨도 없다. 그 ‘문제’에 관하여 작가가 오랫동안 속해 있던 아카데미의 견고함은 딴 사람들이 더욱 접근하기 힘들게 성을 쌓아왔다. 평소에 그와 손발을 맞춰오든 스태프의 협업이 아닌 우리 작업은 최상의 전시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점은 난해한 그의 작품을 그 자체로 감상하는 측면에 있어서는 불리한 점이다. 더구나 이번 전시는 사립 갤러리와 공공 미술관과 대안공간을 잇는 커다란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전체 전시의 성공과 실패 앞에서 일정 부분의 책임을 져야 할 입장에 놓여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전람회의 자유로운 응시자다. 오직 지난 1년 동안 작가의 손을 거쳐 탄생한 그림들만으로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나에겐 또 다른 경험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그의 새로운 작품들은 아직 벽에 걸리지 않았다. 그 작품들을 미리 봤던 나로서는 그것들이 전시 공간에 선 보일 그 날을 기다린다. 정병국이라는 화가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들대로, 이미 아는 사람이라도 그들대로 이번 전시는 새로운 파격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마치 영화 스크린처럼 커다란 그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드넓고도 무심한 우주 공간, 바다의 심연, 불모의 사막 한 가운데 버려진 듯한 소외감을 느낀다.


 특별히,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띠는 점을 몇 개의 작품에 준거해서 언급하자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그의 회화에 있어서 배경은 인물이나 사물의 뒤에 드리워진 들러리가 아니다. 배경을 그리기 위해 대상이 따라 그려진다고 볼 수도 있다. ‘차분한 맥박’에서는 파란 배경만이 처음으로 그림의 전부를 차지하는 시도가 드디어 처음으로 나타난다. 한편 ‘파편’은 푸른색으로 인물이 묘사되고, 대신 붉은 용암 빛이 배경으로 놓인다. ‘내가 그린 그림’에는 삼분위로 나뉜 검고 푸른 배경 앞에 역시 삼각형 구도로 대비되어 놓인 구(球)형과 남자 나신이 배치되어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회화에서 대상의 묘사만큼 중요한 게 결코 계량적으로는 측정될 수 없는 구도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꽃그림. 그에게 꽃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꽃은 인간 본성의 표상이다. 그것은 예컨대 다른 그림 “검은 빛”에서 수캐가 길게 내려트린 혓바닥처럼 동물적 본능에 반응하는 유기체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경멸적인 뜻으로 쓸 수도 있는 단어 ‘꽃그림’들과 그의 그림은 구별된다. 작가의 그림을 지배하는 일종의 불경스러움은 단순히 벌거벗은 인물상이나 육욕에 관한 알레고리 때문은 아니다. 끼일 데와 안 끼일 데를 가리지 못하는 탈 맥락성 때문이다. 화폭을 온통 꽃으로 뒤덮은 ‘月下之情’을 보면, 장미꽃들이 장미넝쿨이 아닌 엉뚱한 수풀 사이에 피어 있다. 내 눈에 그 꽃들은 그림 속에 융화되어 어울리지 못하고 둥실대며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일상 대화중에도 ‘느닷없다’는 말을 곧잘 쓴다. 느닷없음,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들은 느닷없이 그림 속으로 내던져졌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쓴 개념인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의 그림자가 작품 전체를 휘어 감고 있다. 삶이 결코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펼쳐지는 이 불안한 세계관은 작가의 그림을 더욱 섬뜩하게 만든다.


 그의 그림은 논리적 개연성이나 역사적 순리, 사회에서 합의된 가치 따위의 맥락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탈 맥락성 때문에 그의 그림이 포스트모던한 회화로 분류되는 것은 잘못이다. 탈 근대적 미술이라고 말하기에는 그의 그림 속에 작가 주체의 시선이 너무나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번 전시에 공개되는 그림 가운데 내 눈에 가장 매혹적으로 들어오는 한 작품의 이름인 동시에, 전시회 전체의 제목이기도 한 ‘짙은 그림자’는 바로 작가 정병국의 정신적인 징후로서의 그림자다. 작가 스스로가 밝히기를, 그림자는 존재 너머에 있는 또 다른 형상인 회화를 가리킨다. 그리고 언어적인 유희일지도 모르지만, 그림자는 그리움에 관한 작가의 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작가가 잠시라도 머물렀던, 그래서 어쩌면 그가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지나온 삶 곳곳의 흔적이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


정병국의 푸른 회화


1.
정병국의 화면에는 몇 개의 색깔들만 등장한다.
푸른색, 그 대비로서의 회색, 그리고 강조되는 단순한 색깔들 뿐 이다. 붉은색을 중심으로 노랑색과 녹색이 등장하기는 하나 주된 색깔은 푸른색이다. 그 푸른색은 화면의 중심을 이루는 인물이나 소품들에 비해서 배경처럼 위치하고 있다.
중성적인 회색과 대비를 이루면서 화면에 신비스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으며 중심인물에 대하여 강하게 발언하고 있다. 회색 위레 등장하는 밝은 꽃들이나 풀들은 하잘 것 없이 보일수 있으나 중심의 주제가 되는 인물을 회화적으로 설명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어느 화면에서나 위에는 푸른색, 아래는 중성적인 회색으로 분할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연상할수 있는 하늘이나 땅이 아닌, 어떤 충돌 또는 의미로서 읽혀질수 있다.  화면 위릐 푸른색은 강한 대비감으로 인하여 작품을 보고 난 한참후에도 중심이 되는 이미지를 뛰어넘어 우리의 심리적 뇌파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다. 이것으로 정병국은 의도하고 있는 인물의 내면적 심리를 담아내고 있으녀 현대인의 고뇌를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결국 정병국은 이 푸른색의 발언을 위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1980년대 그의 작업은 물감을 혼합하기 않은 원색 그 자체를 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푸른 배경은 색감이 가진 본래의 느낌을 무화시키면서 어떤 상징을 암시하고 있다. 그 배경은 주제로 그려진 아무나 중심이 되는 뒷모습의 사람들의 이미지를 역전시키고 있다. 색감의 차원이 아니 구체적인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오히려 앞에 그려진 인물보다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많은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무것도 섞지 않은 물감을 그대로 사용한 푸른 바탕은 그 푸른 물성의 입자들을 동원하여 인간의 내면 속에서 꿈틀거리는 원초적 본능을 드러내고 있다. 하늘인지 바다인지 알수 없는, 정병국이 지향하는 그 푸른 바탕은 자연의 풍경 같기도 하며 ‘물성화된 감정’같기도 하며 앞에 그려진 인물의 잠재의식을 읽어내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 인물은 어느덧 얼굴 없는 사람이 되고 물성 그 자체를 그대로 바른 그 푸른 바탕은 하나의 자율적인 언어가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의 뒷모습은 오랜 그의 생활속에서 배어나온 ‘인간 삶의 집약’일수 있다. 오히려 강한 시각적 발언이다. 익명적인 사람의 뒷모습을 통한 , 인간 내면 속에 잠재하고 있는 함축된 원시성을 드러내고 있다.
어떤 경우는 사람인지 배경인지 구분할수없는 혼돈된 화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인간이 자연과 혼합되어 자연의 일부처럼 자연이 인간의 일부처럼 서로 혼미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 경우 모든 이미지는 본래의 성격을 벗어버리고 정병국의 메신저가 되고 있다. 알수 없는 이미지, 뒤틀어진 형태, 그리고 비정상적인 비례 등이 사실보다 강렬한 진정성을 전달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날것 같은 , 지극히 유치한 푸른 바탕, 그리고 그 위에 부유하듯이 그려진, 붉은 색의 깊은 맛은 하나의 현실을 뛰어넘은, 정병국이 만들어낸 초현실의 세계이다. 이세계는 정병국이 어린시정 꿈꾸없던 것들이 잠재의식 속에 앙금처럼 가라 앉아 있다가 단숨에 비집고 일어나 불현듯이 생겨난 ‘정병국의 진정성’이다.

이러한 경향의 작업들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예비군복 같은 사회의 상징적인 옷의 껍데기로 변모되었는데, 그 옷은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듯이 표현된다.
깝데기만 있는 인간의 허상을 보는 듯하다.
그 허상속에 있었던 인간의 진정성은 무엇이었을까.

19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정병국은 사람의 정면의 모습을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황을 설정하며 인물을 설명하는 여저가지 소품으로서 자연물이나 풀, 그리고 동물들이 등장하나. 어떤 경우는 최소한의 이미지만을 유지하면서 최대한 소거하며 초현실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했다. 제복을 입고 훈장을 단 완벽한 복장의 군인, 거울을 쳐다보고 있는 누드의 여인을 거울속에서 바라본 시전, 정장을 입은 신사의 반쯤 발인 얼굴 등 인간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담아내고 있다. 이는 어떤 내용을 함축하고 강하게 전달하여는 정병국의 숨겨진 의도이다. 마침내 그는 왜곡과 변형, 비현실성, 비사실적인 서술을 통하여 진지하게 인간의 원시성을 드러내고 있다.

2000년대에 이르면 그의 작업에는 벌거벗은 누드의 남성들이 등장하여 자연속에서 어떤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성을 알수없는 중성적인 나성. 실체는 보이지 않되, 무엇인가에 힘을 작용시키는 근육질 남성의 굳센 모습들.
무엇을 하는지 알수 없으나 무엇인가에 개입하는 사람들.
고뇌하나 표정없는 석고 같은 인물의 어색한 자세.
누드의 남자, 화려한 꽃, 도저히 어울릴것 같지 않은 날림의 푸른색
이처럼 부조화로 이루어진 비상싯적 화면은 정병국이 의도하는 원시성의 세계이며, 이 알수없는 난해한 색감은 바로 정병국이 의도하는 아름다움으로서의 인간적인 메시지가 되고있다.
허공을 바라보거나 , 어린 소년이 누드로 서 있거나, 건장한 군인들이 조깅하는 모습을 배경으로, 흩날리는 꽃잎.
고속도로 변 코카콜라 자동판매기 평에 서 있는 누드의 연인.
누드의 미남자가 의자에 걸터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과 화려한 플라스틱 같은 꽃들.
강가의 빈 배 위에 서 있는 발가벗은 소년 부다.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의도에 의해서 발언되고 있는 상황이다.
공중에 흩날리는 낙엽을 그려, 보이지 않는 바람을 알아채개 하듯이, 정병국의 작업들은 이미지들의 허상을 통하여 살아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추상적인 힘’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 가득함과 비어있음, 양과 음의 양의적 지점에서 고뇌하고 있는 인간의 실존성에 대하여 진지하게 묻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정병국이 연출하는 인간의 실존과 시간의 덧없음이다.

 

3.
정병국은 단순한 외형의 표현만으로 예술작업이 될수없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사물이 보이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것은 예술의 의미를 담아낼수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작업이 단순한 감각경험으로부터 깊은 사유와 되새김을 통해 거듭난 사고 체계임을 의미한다. 그의 작업은 인간의 실존적 철학을 근거로 하여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인식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의미이다.

한편으로는 그의 작업은 희극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가능성 속에는 ‘본질주의’라는 깊은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위해 그는 무모하리만큼 강렬하고 원시적인 색감을 시도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적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을 통하여 일종의 억압을 시도하고 있다.


평범한 것들에 대한 그의 강력한 변용과 왜곡은 인간의 윈시성과 이중성을 회화적인 어법으로 서술하려는 하나의 방법이 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되 화면에서 더 이상 평범하게 존재하지 않는것들이 되었다. 이처럼 평범한 요소들이 하나의 예술적이 본질을 밝혀내는 요소로 기능하게 되는것은 평범함을 뛰어넘는 그 나름의 철학적 반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본질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화면에 등장하는 이미지가 지시하는 외형적 방식이고 다른하나는 그 이미지에 감추러져있는 이중적 속성이다. 그의 이러한 두가지 접근은 화면을 환기시키는 긍정적 요소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극단적 대비는 인간의 진실을 예술로 바꾸는 그의 뛰어난 구성능력과 갚은 사유에 근거한다.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예술이 쉽게 도달할수없는 어떤 절박감을 하나의 언어로 환기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그림을 볼때 화면을 형성하고 있는 항목들에게만 주목하게 되면 그의 심연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속성을 이해할수없게 된다.
이러한 평범한 것들에의 극단적인 변형을 통하여 인간의 실존감을 제시하고 인간의본성을 드러내 보이는 그의화면은 비현실적인 색깔들로 뒤덮여있는 상상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상상력은 오히려 철저한 실존과 생활속에서 배어난 깊은 우수의 반대편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그릐 작픔들에서 느껴지는 감각적인 표현은 시각적으로 인간의 눈을 간하게 자극하고 있으나 그 자극은 결국 우리의 심연을 건드리는 하나의 메신저이다.

이처럼 특정한 사유를 보편적으로 표현하는 정병국의 뛰어난 능력은 시각적 어법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으며 우리시대를 특징짓는 메타포가 되고 있다.

 

김용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