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cophony : Shuffle Cards
 
Geum Joong-ki
 2011. 12. 19 - 2012. 1. 14

낙관적 형식

 

예술은 그 출발이 자연을 사람 마음대로 바꾸는 기획이었다. 물론 그 기획은 애당초 소박했고, 우연에 기대어있었고, 총체적이지 못했다. 완벽한 것은 자연이었으며, 부족한 것은 인간이었고, 사회였고, 예술이었다.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알게 된 것을 토대로 예술 개념을 확장시켜왔다. 이때 자연미는 예술미의 척도가 되었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은 미 그 자체가 맞추어 놓은 궁극적인 방향이었다.

 

서양 사람들은 동양 사람들보다 더 분석하기를 좋아했다. 예술에서도 그랬다. 15세기에 이르러 서구 예술은 철학자나 신학자가 해답을 내어 놓을 수 없는 독특한 유형의 앎이 필요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표현 방법의 문제는 두드러졌다. 사람들은 예술 속에 좋은 의도와 방식(way)을 가진 도덕을 포함시켰다. 예술 이론과 윤리학은 구별될 수 없었다.

 

18세기에 이르러 바움가르텐으로부터 헤겔에 이르러 미학이라는 지식 체계가 새롭게 생겨나면서, 예술에서 감성보다 이념을 위에 놓는 긴장 상태를 만들어갔다. 헤겔 본인도 과도기적 상태라고 봤던 미학은 예술을 다루는 일부분이었다. 하지만 미학의 예술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예술을 관찰하는 과학의 일부분이었다. 지금 한국의 미술대학들에서처럼 예술학에 구비된 한 분야가 아니었다.

 

미술 위에 군립하며 승승장구해가던 미학은 현대 미술의 무차별성 앞에서 예술의 종말이라는 선언적 의미를 내세운다. 그리고 ‘무슨 미학’이라며 새로움을 강조하는 미학은 기존 미학적 전통과 연관된 전제를 끊으려는 시도를 한다. 이러한 상황을 미학 바깥에서 관찰하면 예술이, 예술작품이 종말을 맞은 게 아니라, 실은 예술을 설명하려는 미학이 종말을 맞은 것일 뿐이다. 예술은 계속 된다.

기존의 미학도 금중기의 미술 앞에 구조 비평을 쏟아낼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효율적이지는 못하다. 사려 깊고 예민한 이 조각가가 펼쳐놓은 기법과 이미지는 보는 이들에게 도덕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이는 현대 예술 이론에 윤리학을 복권시키는 쪽으로 작용한다. 예술 제도를 성찰하는 윤리는 예컨대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깊숙이 개입한다. 물론 금중기의 조각과 설치와 사진 작업을 정치적인 예술로 파악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환경문제를 정치와 연결시키는 태도는 당위성을 얻었다. 이때 정치가 예컨대 개발(보수 정파)/보존(진보 정파)라는 당파적인 대립 구도를 상정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 금중기의 미술 속 정치는 호혜성에서 비롯된다. 즉 ‘상대방이 좋으면 그건 우리도 좋은 일’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

 

금중기의 작품으로 등장하는 생명체들의 상(像)들은 본래의 자연색과는 전혀 다르다. 이 조각들은 강한 원색이 뒤덮여 있다. 이 화려한 색들은 자연 세계의 상징이 아니라 문명 세계의 인공적인 가해를 상징한다. 그동안 작가가 지속적으로 작품에 담아 온 ‘위협문화’라는 주제는 ‘문화’라는 18세기적 유럽의 세계관 속에 도사린 배타성과 정복욕을 들추어내는 수단이 되었다. 문화에서 파생된 다른 역사적 개념들, 예컨대 매너, 교양 같은 규범이 자연뿐만 아니라 다른 인종과 계급을 얼마나 교묘하게 차별하여 착취해왔는지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동물/자연을 통해 인간/문화를 바라보고 있다. 조각 작품과 대구를 이룬 사진 작업은 저마다 고유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그것은 조각 작품보다 훨씬 직설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중기의 미술은 구차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은 채, 스스로에 대한 어떤 해명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선 경탄만을 요구한다. 과거, 미학의 시대에서조차 예술은 과학이 할 수 없을 법한 것을 표현하는데 점점 집중해왔다. 예컨대 미와 추의 구분, 실재와 허구의 구분, 완성과 미완성의 구분, 궁극적으로 예술과 비예술의 구분을 확실히 마련해두고, 그 구분을 교묘히 흩트렸다. 이러한 역설(paradox)은 문학에서는 수사학의 기술로 전통이 되었다.

 

말하자면 금중기의 조각은 입체적인 공간 속에 수사학적인 역설을 자리매김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모호함과 참신함을 내세우며 낡은 예술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그 아름다운 환영 덕택에 그의 예술 형식은 장식적인 면에서조차 제대로 기능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예술가의 비판은 비관적 전망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은 낙관성이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