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ee Jin-yong
 
Kang Yoon Jeong - Promotion for young artists
 2011. 2. 14 - 2011. 2. 26

틈 : 없음이 가리키는 현존의 질서


강윤정 Draw-Crevice 전

 

 나는 올해 초 강윤정이란 작가를 대면하기 꽤나 이전에 그녀의 작품을 먼저 접했다. 그때 나는 작품을 감상하면서 작가의 모습과 성향을 상상했다. 그런데 직접 본 그녀의 인상은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거의 흡사했다. 물론 나는 이 말을 본인에게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한 눈에 꿰뚫어 보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 앞에서 유쾌해 할 이는 그리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하면, 강윤정이 그녀의 작품에 자기 정체성을 그만큼 잘 담아두었기에, 우둔한 내 눈으로도 그 점을 발견했다는 논리가 만들어진다. 강윤정이 벌이는 작업은 작품을 통해 그녀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특별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포괄하는 삶이 가진 일반적인 태도이다.          


 강윤정은 우리가 언뜻 생각할 때 예술적인 기교가 그다지 들어가지 않은 비예술적 행위에서 작업의 실마리를 따온다. 그녀의 작업은 종이를 여러 장 쌓아 붙이는 일에서 시작한다. 대부분의 미술은 그 출발을 종이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작가는 종이 위에 선을 긋거나 색을 칠하지 않고, 종이 그 자체의 부피감을 작품으로 나타낸다. 따지고 보면, 나무의 변형인 종이는 텍스트를 기록하는 수단으로만 쓰이지 않는다. 종이는 예컨대 방한과 방풍 기능, 또는 물건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쓰임새도 가진다. 종이로 만든 이 얇은 안내책자 또한 작품 전시를 돕는 보조 역할이 아닌가. 작가는 종이 더미가 가진 물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런데 그 물성이 문제다. 종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변색되는 성질을 운명적으로 지닌다. 물론 작가가 쓰는 종이는 가령 프린트 용지처럼 변질에 대한 저항성을 상당히 갖춘 재료로 선택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종이는 종이일 뿐이다. 종이는 쇠가 아니고 돌이 아니다. 그것은 곧잘 찢어지고, 더럽혀지기 쉽고, 바래지기 쉬운 ‘만만함’을 타고났다. 그렇다고 강윤정의 작업이 그것처럼 만만한 것은 아니다. 이는 돌을 깎아내고, 쇳덩이를 용접해서 갖다 붙이는 일만큼 근력을 소모하는 일은 아니지만, 상당한 수고와 함께 무엇보다도 인내심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작업이 작가의 퍼스낼러티를 결정했는지, 아니면 거꾸로 작가 성향이 이런 작품을 산출했는지 단정 지어서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작가와 작품 양쪽 모두는 결벽증이란 말을 써도 맥락이 이해될 정도로 꼼꼼하다. 

    
 작가가 굳이 종이를 써서 번거로움을 더한 까닭은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틈 때문일 것이란 생각도 적지 않다. 작가는 틈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녀의 작품을 얼핏 보면 목재나 합성수지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종이답게 드러내는 것은 틈이다. 틈은 부재(不在)하는 상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무한한 논리적 순환의 역설(paradox)을 만들어내는 틈을 존재자로 볼 것인지, 무(無)로 볼 것인지 확정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현상학적 세계관에서, 그리고 강윤정의 예술론에서 그 틈은 존재자가 맞다. 때로 아무 것도 없는 영(0) 그 자체가 명백한 맥락이 되곤 한다. 종교에서 욕망을 완전히 떨쳐낸 득도의 경지, 경제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한 푼도 없는 재정적 상황, 과학에서 통계확률이 영 퍼센트인 가설 검증, 사랑에서 연인으로부터 답장을 받지 못한 소외 상태 등은 각각의 상황 모두가 티끌만큼이라도 존재하는, 소수 0.1과 완전히 다른 맥락이다. 틈은 비율만을 따질 때에는 보잘 것 없는 부분을 점유하지만, 그것이 있고 없고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된다.


 강윤정에게 틈은 어떤 의미인가. 이미 작가는 ‘틈’이라는 낱말을 예전부터 즐겨 사용해왔다. ‘틈’, 파열음 ㅌ으로 시작되어 입술이 모두 닫히는 ㅁ으로 맺어지는 이 발음은 처음에 세게 갈라지고 터지다가 결국은 메워지는 완결체이다. ‘틈’이 가진 기표와 기의는 이처럼 일치하지 않으며, 스스로 논리적인 틈을 드러낸다. 순백의 종이가 그녀의 겹겹이 쌓인 의식 구성체를 표현하는 모형이라면 틈은 무의식으로 통하는 징후가 된다. 이와 달리, 종이가 작가 개인을 둘러 싼 시간과 공간의 기록 수단이라면, 그 합리적인 기술(description)로부터 비껴난 예술적 표현이 틈으로 상징될 수도 있다. 작가가 매달리는 작업은 이미 말과 글이라는 논리적인 체계로 풀어낸 틈을 얼마나 적실하게, 또 우아하게 재구성하여 보여줄 수 있을지 실험하는 행위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지적처럼, 사물과 그것을 가리키는 말은 항상 정확히 일치할 수 없다. 그 자체가 틈이다. 작가는 그 틈의 인식을 표현하려고 한다. 역설은 그 기획을 빈틈없이 재현하려는 데에서 발생한다. 

 
 강윤정은 주로 직선의 중첩을 완성해왔지만, 이번에는 곡선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2차원 개념에서 차원 하나를 보태어 또 다른 틈의 세계가 구현된 셈이다. 당연히, 이 틈은 계획된 것이지만 좀더 세상에 관대하게 통로를 열어두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틈이 가진 아름다움을 느끼고, 틈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 깐깐한 직선의 배열만을 봐온 나로서는 그녀의 새로운 시도에서 일종의 유머도 발견한다. 그녀의 확고한 의식 속에 용인된 틈이 공간을 만들어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 공간이 책의 은유라는 사실도 뒤늦게 발견했다.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책, 그것은 책이 아니거나, 쓸모없는 책이다. 그렇지만 유용한 텍스트로 채워진 책 또한 읽히지 않으면 그것은 쓸모없는 책이거나 더 이상 책이 아니다.


 애당초 쓸모없는 책과 다를 바 없는 이 종이 더미는 예술 행위로든 비예술적인 일상 행위로든 익숙한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예술과 비예술의 양쪽으로부터 모두 타자로 취급받으며 주변으로 밀려난다. 이 현대 미술의 탁월함은 바로 여기서 생긴다. 틈에는 중심이 없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결핍을 투정부리듯 나타내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꽉 차있는 다른 무언가를 기다리며 언제라도 자리를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작가는 종이가 가진 직사각형의 일정한 형태에 구속받으면서도, 결코 확정되어 구속받지 않으려는 틈을 드러내고 그 속으로 우리의 자아를 끝없이 스며들어가게끔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윤규홍, 미술평론/예술사회학)

 

 

 

작품을 가로 지르는 선의 문법


 인간의 눈이 식별해 낼 수 있는 크기의 한계가 작게는 0.1mm 이하 수준에 이른다. 바로 종이 한 겹의 차이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언뜻 인지하기 어려운 그 차이를 작가 강윤정은 자신의 작품으로 드러내려 한다. 그녀는 하얀 종이를 잘라서 하나하나 색을 입힌다. 그 낱낱의 종이들은 겹겹이 쌓여 하나의 덩어리 느낌이나 그림의 형태가 된다. 일종의 착시 효과가 만들어내는 기호의 다채로움이다. 0.1mm에서 0.5mm의 간격을 둘 뿐인데, 관객의 눈앞에는 역동적인 이미지가 펼쳐진다. 우리는 그녀의 작품을 대하면서 원거리에서 느껴지는 변화무쌍한 감각과, 가까이 다가서서 관찰하게 되는 정밀한 구성 원리, 이 두 가지에 경탄하게 된다. 

           
 작가가 품고자 하는 미술에서 세밀하게 손이 많이 가는 특성(나는 이 성질을 가리키는 말이 있음직하지만 그것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지 못하고 있다. 노동집약성? 비슷하지만 그것은 아니다)은 끔찍하리만큼 꼼꼼한 자신과의 싸움이다. 여기에 속임수를 쓰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화폭에 새겨진 여러 색과 형태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들의 눈앞에 비춰져 나타났다가 흐릿해지길 반복한다. 수많은 종이의 끄트머리에 드러난 그 중첩과 채색의 이미지는 빈 공간을 보충하는 단자들일 뿐이다.


 그녀는 자기의 미술세계를 ‘틈’으로 설명하려 한다. 예술사회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비평은 그 ‘틈’을 구조와 행위의 접속 패턴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한지와 붓과 먹을 더 이상 즐겨 쓰지 않는 동양화가, 전통적 화법을 따르지 않고 현대미술로 건너 간 한국화가, 이 같은 미술제도(구조)로부터의 일탈(행위)은 작가로 하여금 틈이라는 대안 담론을 착안하게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틈의 미를 둘러싼 담론은 작가 본인의 창작 방법론과 일치했다. 틈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 비워진 무 無 의 상태지만, 그것이 가진 맥락은 있고 없음 有無 을 넘어서 뚜렷하게 인식되는 사유의 존재다. 있지만 동시에 없는 대상, 이러한 논리의 역설은 곧 예술로 다루어진다. 논리의 전개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과학과는 별개의 장에서 틈을 둘러싼 논리의 허점은 미와 추를 구별하는 예술에서 환영받을 것이다.     

 

 또한 작가가 지금까지 감행해 온 제도로부터의 일탈은 그 결과를 스스로 껴안아야 하는 위험부담에 관한 불안감을 키운다. 따라서 그녀에게 틈은 위험부담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내어야 하는 도피처인 동시에, 끊임없이 그것을 채워야 하는 이중의 모순에 갇힌 심리의 징후이다. 강윤정은 이 논리적 불일치를 정교한 계측 행위 속에 끌어들인다. 핀셋과 자와 접착제를 이용하여 각각의 구획을 일정한 수의 종이로 간격을 맞추는 작업은 뜨거운 구상과 대조되는 차가운 실행이다.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 강윤정은 이전까지 보여 준 이미지보다 좀 더 정제된 작품을 선보인다. 점이 모인 선이 다시금 면을 이루어 형태를 재현하는 미술의 일반적인 과정 대신 선(이라기보다 종이의 날이 드리우는 그림자라고 해야겠다)이 그대로 형태를 구성하는 방식은 더욱 뚜렷해졌다. 모든 작품은 수많은 틈을 채우고 또 허용하는 정도의 변화를 강조한다.


 그녀가 가진 예민함은 전시의 완성도와 삶의 풍요라는 현실적 가치 앞에서 더욱 요동칠 수밖에 없다. 내 생각에는 이러한 불안 또한 작가 본인이 가진 재능의 일부이다. 그녀가 매번 제시하는 새로운 작품에는 젊은 미술가가 가지는 불안이 드리워져 있다. 불안은 대충 손쉽게 한 작품을 완성하거나 한 전시를 마무리하고 성과를 거두려는 유혹을 떨쳐내는 동력이 된다. 아래위로 내려진 선은 그 행위를 확정하려는 작가의 의지이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