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m Chang-min
 
Richard Jochum - Wow! This Is Not A Joke, It's Art?
 2010. 3. 2 - 2010. 3. 17 / 2010. 3. 2 - 2010. 3. 1

1.현대예술에 있어서 자기성찰성

 

현대예술에 있어서 자기성찰성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사랑은 연인에게 항상 최상의 것만을 제공하진 않는다. 때로 그들은 싸운다. 헤어지리라 마음먹고 그리고는 술을 마시고, 끼니도 거르고... 당사자에겐 그 어떤 것보다 심각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한 갈등관계는 흔한 사랑싸움으로 비춰지기 마련이다. 일반적인 관찰자인 제삼자들이 가지는 무심함(hardness)을 가질 여유가 그 두 사람에겐 없으므로 시야가 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거울이라는 물건이 없다면 우린 스스로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사회라는 체계역시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필요하다. 과거에 종교와 과학은 그러한 성찰의 기능을 맡아왔다. 그런데 거울은 스스로를 어떻게 비출 수 있을까? 종교라는 거울은 독자적으로 바람직하거나 그렇지 않은 행위의 차이를 정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그 기능의 많은 부분을 다른 체계에 떠넘기게 되었다. 과학 또한,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인 패러다임을 지탱하던 합리성이 지닌 맹점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지면서, 지식생산(거울을 만드는 것)과 관찰(거울로 비추는 것)이라는 두 가지의 고유 기능을 더 이상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자기성찰성(self-reflexibility)은, 예컨대 종교(회계/구원), 과학(관찰/증명), 법(중재/심판) 등 체계가 저마다의 프로그램을 통해 수행하는 성찰성을 각자의 언로를 통해 피드백하려는 경향이며, 이는 예술이라는 특수한 체계의 분석에도 쓸모 있는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예술에 진지하게 접근하려는 사람은 철학자나 사회학자보다 예술가 자신이다. 지금까지 많은 예술가들은 대학의 울타리 안에서 과학적인 성과물을 통해 자신을 보아왔다. 예술가 상당수는 그들 주변의 관심사가 아닌 철학 서적이나 신문에서 착상을 가져온다. 작가 자신은 그것이 그에게 있어 치열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한 문제들은 자신의 일상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고민을 흉내낸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 문제는 대부분 서구의 일반적 가치나, 거장들의 방법론 또는 미학자들이 생산해낸 담론에서 빌려온다.

   
  자기성찰성의 과정에는 다양한 대항 담론이 형성된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관습적인 가치에 맞선다. 문화 담론을 만들어내는 대학, 박물관의 전문 지식인들과 정치는 결합되어 있다. 예컨대 전통문화를 보존하자는 의견이나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추구하는 진보세력 역시 자기성찰적 관점에서 보면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어떠한 대안이라도 일단 그 가치가 일반에게 받아들여져 권위를 가지게 되면 낡은 종교를 대신해 그 자체가 새로운 신화로 세속화하고 만다.


  서양의 과학문명의 대안으로 칭송받는 인도는 역설적이게도 세계 최대의 환경오염국이다. 인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수의 화력발전소와 원자로를 도입하고 있으며 그 원자로들 중 일부는 전략핵무기를 만드는 시설로 쓰인다. 인도의 하천은 전통적인 화장제도와 더불어 서구에서 들여온 살충제 때문에 단지 4%만이 식수로 가능하다. 당연히, 우리가 보는 인도는 서구인들이 바라본 인도이다. 


  현대의 예술 속에 자기성찰성은 들어오고 있다. 애당초 비평은 외부의 시선이었다. 그런데 그 비평이 완전한 것이 못되었다. 점점 복잡해져가는 예술적 상황은 비평가 개인의 역량과 관련 없는 문제를 낳는다. 그러므로 현대예술의 젖줄이 되는 인문사상이나 과학이론은 문제의 근원이자 해결책이라는 이중성을 가진다! 그것은 분명 논리적인 오류이지만 그렇다고 거짓은 아니다. 그러한 역설(paradox)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자기성찰성은 냉소적이고, 무심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급진적인 생각의 틀로 확산되고 있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

 

 

 

 

2.리처드 요쿰 비평

 

사서 고생하기 : 리처드 요쿰의 현대 미술 분투기(2001-2010)

 

  화악 깬다. 내가 리처드 요쿰(Richard Jochum)의 작품을 처음 접할 때 그랬다. 나는 “화악 깬다”라는 속어적 표현 말고 좀 더 번듯한 어휘를 찾고 싶었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상태가 보편적인 상식의 범주나 기대 수준에 닿지 못하거나 반대로 넘어서는 경우에 생기는 언짢음을 적절하게 나타내고 싶은데, 그렇다고 가령 ‘신선한 충격’, ‘발칙한 시도’ 같은 상투적인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적어도 인상 비평의 차원에서만 따지면, 이 잘 생긴 백인 남자의 작품은 화악 깬다. 이것 장난 아니다.  


  리처드 요쿰은 한국에서 가지는 그의 첫 개인전에 다양한 매체 예술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작들은 LCD 패널에 영상을 담은 일련의 미디어 작업과 갖가지 종이를 사진으로 찍어서 출력한 <페이퍼 시리즈>로 나눌 수 있다. 두 시리즈의 어느 한 쪽에도 넣을 수 없는 설치 작품 <히스토리 오브 아트>이 있는데, 이는 작가가 직접 편집해 만든 책을 선반 위에 오브제처럼 전시해놓은 작업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철학자(책, 논문)로서의 지적 활동과 예술가(설치 미술)로서의 미적 행동을 동시에 구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히스토리 오브 아트>에는 이론과 실기라는 이중으로 나누어진 코드(code)가 맥락화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이중적 코드의 경계선(borderline)는 작가의 모든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인덱스 핑거> 속에서 세 명의 다른 인물로 분장한 작가는 원본과 모사의 대비를 보여주려고 애쓴다. 또한 여기에는 정적인 이미지(사진)와 동적인 이미지(동영상)의 경계도 비추어진다. 그런데 그 이미지들은 감쪽같이 재현된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약간 어설프게 흉내 낸 것들이다. 작가가 포장지류를 써서 완성한 <페이퍼 시리즈> 또한 이중적인 코드가 들어있다. 평면(종이 그 자체)과 입체(구겨진 종이)의 존재론적 갈등(ontological conflict)은 사진 출력이라는 최종 단계에서 다시 화해되는 방식을 취한다.


  리처드 요쿰이 선택한 또 다른(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중적 코드는 허구와 현실 사이의 관계이다. <시치프스 온 배캐이션>, <아틀라스> 연작, <스노우Ⅱ>와 같은 작품들을 보면, 리처드 요쿰은 신화와 세계의 관계를 예술적 행위와 일상적 행위에 빗대어 말하려 한다. 이는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예술사회학적 명제-‘무엇이 예술이며, 무엇이 비예술인가?’에서 논의되는 한 가지 요소인 유용성/무용성 코드가 담겨있다. 영상 미디어 작업이라기보다 짧은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불러야 옳은 이 작품들 속에 출현한 작가 본인은 얼굴을 벌겋게 물구나무서서 지구를 들고, 돌멩이를 산꼭대기로 나르고, 바위만한 눈덩이를 굴린다. 신화에서야 노한 제우스가 내린 형벌이라지만, 현실계에서 요쿰이 당하는 형벌은 도대체 누가 내린 것일까? 그 답이야말로 리처드 요쿰이 정의하려는 현대 예술론이다.


  에서 작가는 높은 나무 위에서 자신이 앉은 나뭇가지를 톱으로 자른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는 다른 나뭇가지를 거머쥐고 있다. 즉, 떨어지기 싫지만 떨어지길 원하는 작가, 그것은 단순히 위험한 행동-danger-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여만 하는 위험부담-risk-이다. 울리히 벡(Ulich Beck)의 위험사회 이론을 예술사회 버전으로 바꿔놓은 이 작품처럼, ‘철학자’ 리처드 요쿰은 그의 모든 작품을 이론적 배경 아래에서 미리 계산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어설픔조차 미리 짜놓은) 완성했다.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 학자 콘라드 로렌츠(Konrad Z. Lorenz)의 동물행동학을 그대로 작품으로 옮긴 <12 앵그리 도그스>를 보라. 당황스럽기에 앞서, 이것은 차가운 예술이다. 하지만 리처드 요쿰의 예술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 의식과 자각의 구조적 연동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생긴 틈을 통해 아름다움이 곳곳에 숨어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다.

 

(윤규홍, 예술사회학/Art Direc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