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칠
 
Lim Taek
 2009. 6. 1 - 7. 4

당대의 감성으로 옮겨온 산수를 유람하다

 

임택이 내세우고 있는 ‘옮겨진 산수 유람기’라는 주제는 동시대의 감성으로 표현해낸 풍경 즐기기이다. 그는 전통을 잇는다는 명분을 가지고 고전을 박제화 하는 관념산수의 관념성을 비트는 의미에서 입체 산수풍경을 만들었고, 그것을 다시 디지털 프린트로 출력해내는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의 패러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작품 속 산과 바위 풍경에 인형이나 실재인물 사진을 배치함으로써 자연 속에 뛰어든 인간의 유희를 담아내고 있다. 동료화가들과 화첩기행에 나서곤 하는 임택은 표현 방법은 달라도 산수풍경에 대한 경험과 이해를 작품에 담아내는 방식에 있어서는 큰 틀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임택의 ‘옮겨진 산수 유람기’는 작가 자신의 실재 산수에 대한 체험을 가미한 패러디인 셈이다. 그의 합성 이미지는 고전과 현대의 꼴라주인 동시에 작가의 경험을 꼴라주하는 것이며, 나아가 경험 너머의 판타지를 꼴라주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당대의 감성으로 옮겨온 산수에서 노니는 과정인 것이다.


고전에서 발견한 원본을 옮긴다는 것은 여러 가지 차원과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원본의 형상을 따다 쓰는 경우나, 원본의 주제나 소재를 옮겨 쓰는 경우, 그리고 원본의 내러티브를 끌어 쓰는 경우 등 실로 다양하다. 임택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요소들에 걸쳐있다. 나아가 자신의 패러디 작업 자체를 디지털 미디어라는 또 다른 차원으로 끌고 나가는 매력을 가졌다는 점에서도 탈근대 시대의 매체환경 아래서 예술 창작과 향유 방식에 관해 진지한 성찰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임택의 초기작 평면 회화는 여백의 미를 중요시하는 풍토를 뒤집고 여백을 그리고 형상을 남겨두는 방식을 취했다. 형상을 그리지 않고 여백을 그림으로써 형상을 드러낸 <현(玄)에 대한 사색> 연작은 형상과 여백의 전치라는 전략을 구사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이 작업을 평면회화에만 국한하지 않고 설치작업으로 연결했다. 그것은 천의 색을 가진 먹색에 대한 환원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거대한 우주를 표현하려는 재현회화의 맥락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거대한 평면 설치 작업 앞에 관객과 작품 사이를 매개하는 제3의 존재인 작은 인형 하나를 설치함으로써 회화가 공간 속으로 확장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해내고 있다.


이후 임택은 고전을 현대미술 작품으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했다. 단선적인 형상재현을 거부하던 그가 새롭게 발견한 것은 평면의 이미지를 입체 공간으로 확장해내는 작업이었다. 2차원 평면으로 일루전을 발산하는 회화의 도상들을 3차원 공간에 존재하는 입체로 만들겠다는 발상이다. 고전의 산수화에 등장하는 산과 절벽의 형상을 무색무취의 입체로 등장시키는 것이다. 단순한 명암 대비로 볼륨을 드러낸 울퉁불퉁한 입체 위에 조그만 인형이 하나 올려짐으로써 비로소 산수 공간 탐험을 매개하는 설치작품으로 성립한다. 임택은 그림이 아닌 덩어리를 제시했다. 원작 특유의 커다란 바위들을 전시장 바닥에 배치함으로써 고전을 방작하는 데 있어 전혀 다른 발상법을 보여주었다. ‘영통동구’에 이은 입체설치 연작들은 ‘인왕제색’이나 ‘금강전도’, ‘몽유산수’ 등을 거치면서 고전회화의 산수표현들을 공간으로 끌고 나오는 데 성공했다.


임택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디지털 프린트 작업이 그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관통하는 패러디의 패러디이다. 2006년의 디지털 프린트 연작인 <옮겨진 산수 유람기> 연작은 입체화한 평면회화의 모티프를 사진이미지의 원본으로 재발견한 작품이다. 고전회화에 등장하는 산수이미지와 그것을 입체로 옮긴 입체는 각각 원본과 패러디의 지위를 가지는데, 임택은 옮겨진 입체를 다시 사진으로 옮기고 거기에 합성작업을 가해서 디지털 프린트 작업을 만들어 냈다. 원본을 패러디한 자신의 작품을 다시 패러디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중의 패러디이며, 원본과 패러디의 경계를 넘어 무한히 전개되는 이미지 세계의 자기증식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설치 입체 산수의 특정 부분을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해서 실사 촬영하고 그 위에 정교한 합성 작업을 가한다. 컬러풀한 동식물 이미지를 등장시켜 ‘일월성신도’를 만드는가 하면, 시공간을 초월한 판타지를 구성하고, 스케일 있는 험산준령의 스펙타클을 연출하기도 하고, 자신의 구작 <현(玄)에 대한 사색>의 부분을 이용해서 우주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대관 산수의 장대한 분위기를 만드는가 하면, 바짝 들이댄 렌즈 속으로 대관산수의 일부분을 빨아들이기도 한다.


관객참여 설치작업을 통해서 임택의 작업은 또 한번 진화했다. 2006년 이래 그는 ‘옮겨진 산수’라는 주제에 ‘유람기’라는 또 다른 장치를 넣는다. 작품을 감상하는 주체인 관객에게 작품 속으로 참여할 것을 요청하는 장치인 유람 개념은 임택의 작품을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끌었다. 이 대목에서 임택 작품의 관객은 감상자일 뿐만 아니라 참여자로 등장한다. 임택이 시도한 참여는 매우 간략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시장을 방문한 관람객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즉석에서 프린트한 후 인물 형상 부분만 오려서 설치작업 위에 붙여주는 일이다. 얼핏 보아 관객서비스 차원에서 재미를 주는 것으로만 보일법한 이러한 행위는 임택의 작업이 고전을 입체로 번역하는 단선적인 구조를 벗어난 행위이다. 임택의 도전과 실험은 동시대의 매체환경 속에서 성립가능한 감성영역의 확장을 고려한 자기혁신의 과정이다. 디지털 미디어와 대면하는 예술가의 숙명을 거부하지 않고 끌어들인 과정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은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 실재와 가상이라는 이분법을 넘나드는 새로운 어법이다.


임택의 디지털 프린트 작품은 설치작품과 실재풍경을 촬영하는 것과 관객참여 프로그램, 온라인 상에서의 이미지 채집 등 다양한 경로를 거친 얻은 이미지들을 합성한 결과물이다. 그는 카메라 렌즈를 통과한 다양한 이미지들을 다듬어서 겹쳐놓는다. 이러한 작업은 포토샵 툴을 사용한 디지털 합성작업으로 진행하는데, 다양한 시공간을 경과한 다시점(多視點)의 이미지들이 한 화면 안에 배치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몇 가지 관건들이 임택 사진의 묘미이다. 우선 설치작품을 실사 촬영한 산과 바위의 표현이 특유의 종이 재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재의 산과 바위에 비해 매우 절제된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임택의 설치작품에는 볼륨에 따른 명암이 있을 뿐 색이나 마티에르가 거의 없다. 따라서 최소한의 볼륨만으로 형성된 입체를 찍은 산과 바위의 골격 위에 합성되는 여타의 이미지들은 그 배경에 비해 훨씬 더 컬러풀하고 현란하며 다채로울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배경의 미니멀한 설정에 비해 여타의 대상들, 가령 나무와 사람, 자동차와 비행기와 배, 꽃, 해와 달, 새와 곤충 등의 이미지들은 컬러풀하며 역동적이고 다채롭다. 산의 뒤편을 이루는 하늘 표현들 또한 역동적인 구름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는가하면, 연두색이나 노란색을 써서 풍경의 판타지를 자극하기도 한다.


2007년의 최근작에서 이러한 스타일은 유동 시점을 구사해서 포착한 풍경들 위에 매우 섬세한 리터칭 작업을 거치면서 임택 작업사에 있어 방점을 찍을 만한 완결된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다. 근작들은 산수풍경과 유람의 맛을 제대로 살려내고 있다. 설치작품 금강전도와 몽유산수의 부분을 포착한 <옮겨진 산수 유람기 073>은 분재와 실재 나무들이 뒤섞인 낯선 풍경이다. 귤이 떠있고, 갈매기를 타고 날아가는 작가자신의 유쾌한 몽상과 더불어 인형이나 관람객 이미지들을 배치한 대관 산수 이미지이다. 설치작품의 일부분을 클로우즈업한 풍경도 많이 있다. 컬러풀한 하늘에 해와 달이 떠있고, 노송 아래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며 그 아래 바위 밑 길로 학이 거니는 풍경이 펼쳐지고 바위와 바위 사이의 벼랑 앞으로 낙하산이 떨어진다. 실재의 풍경과 장면을 초월한 이러한 구성은 산수를 유람하는 임택의 판타지에서 유래한다. 다수의 작품에서 새나 곤충 위에 올라타서 산수풍경을 유영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넣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옮겨진 산수를 스스로 충분하게 유람하고 있다.


임택의 산수는 카메라의 밀착 정도에 따라 매우 다양한 연출로 이어진다. <옮겨진 산수 유람기 075>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훨씬 더 밀착해서 포착한 풍경이다. 칼을 차고 학을 바라보는 원화의 설정을 살려서 단아하고 짜임새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비행기와 배, 달과 나무, 바위와 한시 등 상호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된 초현실적인 몽환적인 풍경이다. 바위의 그림자가 꺾이는 부분들까지 섬세하게 살려내고, 우측하단으로부터 중심부를 거쳐 우측상단으로 이동하는 시각동선의 흐름과 왼쪽의 여백을 채워주는 바다와 배, 나무, 한시 등의 구성이 전형적인 구성을 취하면서도 색채와 사물과 인물 배치의 생경함이 발현하는 이질감이 크게 다가온다. 너럭바위 아래 등산객을 좇아오는 돼지의 유머와 바위 그림자를 정교하게 꺾어낸 섬세함이 동반된 수작이다. <옮겨진 산수 유람기 0715>는 좌우에 자리잡은 수직 구도의 바위 사이로 중경과 원경의 산이 보이는 드라마틱한 대관산수를 연출하고 있다. 임택의 합성 산수는 화려한 꽃밭을 만들기도 하고, 바나나를 초승달로 만들기도 하며, 인왕제색이나 영동동구와 같은 고전회화의 발문을 바위 벽에 새겨진 글씨로 옮겨 놓기도 하고, 분재 나무가 거대한 크기의 고목으로 자리 잡기도 하고, 곰과 사람과 달이 삼각형의 꼭지점을 이루기도 한다. 바위 사이에서 번지점프를 하기도 하고 나비를 타고 날아가기도 한다. 때로는 기암절벽을 화면 가득 밀어붙이기도 하고 저 멀리 바다를 배경으로 한 와이드 스케일의 풍경화를 펼치기도 한다.


그는 기존에 발표했던 설치작품의 익숙한 시점을 180도 틀어서 전혀 다른 각도에서 포착함으로써 하나의 입체 작품이라도 포착하기에 따라서는 수많은 이미지 생산이 가능한 ‘원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lti-Use)’의 생산력을 십분 활용하기도 한다. 평면을 입체로 끌고 나온 데 이어 전자적으로 부호화한 이미지 생산은 이렇듯 임택에게 풍부한 상상력과 그에 부합하는 생산력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간 그는 이미 고전 베끼기를 넘어서 원본을 생산하는 작가로 거듭나고 있다. 그 예로 인사미술공간에서의 설치작품은 집 뒤편 등산로를 재현한 것인데, 그 공간을 채운 인간 군상들 또한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었다는 점에서 이미 고전을 고정된 텍스트 개념이 아닌 유동하는 가치의 개념으로 전환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 상당수도 이미 고전의 구조로부터 따온 입체이기는 하나 카메라의 시선에 의해 전혀 다른 풍경과 장면으로 재구조화 했다. 임택의 패러디는 비판적 성찰이 결여된 혼성모방인 패스티쉬와 구분되는 유머와 창의력이 넘치는 패러디로 자리 잡았다.


임택이 평면에서 입체로 입체에서 사진 작업으로 전환한 것은 고전 다시 읽기가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의 근거이다. 임택의 작업은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화답이다. 디지털 문명은 이미지 생산의 목표와 공유방식을 뒤바꾸어 놓았다. 전자적으로 부호화한 이미지 생산은 수천년에 걸친 시각예술의 자산 위에 새로운 가능성을 무한하게 추가하는 요소이다. 그것은 일품성의 신화를 복제가능성에 따른 탈신화로 전환하는 데 있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더 이상 천재적 작가주체의 유일무이한 창조주체로서의 역할에만 기대지 않고 창작의 주체와 향유의 주체가 상호 교감을 전제로 새로운 창의력을 발산하는 문화민주주의의 맥락을 형성하는 데도 크게 기여한다. 임택은 지금까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실험으로 온전히 임택 고유의 스타일을 창출하는데 성공했다. 그것이 설치이든 사진이든 간에 임택은 예술가에게 숙명과도 같은 창의력과 독창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지역과 국가, 인종, 민족 등 모든 이질적인 것의 경계를 넘어서는 디지털 이미지의 가능성을 매우 차분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재발견하고 있다. 요컨대 임택의 작업은 설치와 조각, 그림과 사진의 경계를 넘나들며, 나아가 예술을 둘러싼 여타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이다. 나아가 그의 작업은 고전의 맥락에서 출발하되 20세기 이전 문명의 이분법적인 대립구조를 넘어서는 디지털 문명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 것이며 그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하고 있다.

 

김준기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임택 전(1.11--1.27, 인사미술공간)

 

통상적인 산수화는 그림 크기가 크든 작든 간에, 인간 대 자연의 비율이 매우 커서 웅장하고 기념비적인 스케일을 가진다. 이러한 스케일은 단순한 시각적 향유를 넘어서, 그 안에 들어가서 거닐고 싶은 충동으로 전이되곤 한다. 임택의 ‘옮겨진 산수-유람기’(전시부제)전은 산수화를 설치작품으로 풀어냄으로서 그 소재가 무엇이든, 한정지워진 명확한 대상이 야기하는 관조나 소유의 관념를 넘어선다. 그는 전시 공간 전체를 연극의 무대로 삼아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 내부로 들어가 노닐게 한다. 설치작품과는 별도로, 해와 달, 구름, 스카이 다이빙하는 장면 등이 첨삭되어 하나의 장면으로 완결된 이미지를 사진으로 뽑아 걸어 놓았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에 내재된 연출된 무대 장치같은 특성을 더욱 강조한다. 일필휘지로 그어진 붓질처럼 힘차게 전시장 안팎을 휘감아 도는 입체적인 산등성이의 형태가 변화무쌍하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산의 형태를 정교하게 모사한 것은 아니다. 실경을 바탕으로 한 산수화도 관념적인 요소가 내재되어 있듯이, 임택이 연출한 산은 만들어진 인공물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다양한 형태로 각이 진 산들은 눈덮인 풍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잉크 한방울을 떨어뜨리면 금방 번질 것같은 하얀 종이로 이루어진 산의 몸통은 텅 비어 있고, 산등성이에 듬성듬성 심어있는 나무들은 전선 가닥으로 꼬아 만들었다. 중심이 텅 비어 있는 내부를 휘감고 있는 끝없는 피막은 연극성, 즉 명확한 대상이 없는 가운데 지속되는 어떤 느낌과 연관되어 있다. 전선 상록수 옆에 오려진 종이 인형처럼 놓여진 관객들의 사진은 어떤 차원이 삭제된 모형의 느낌을 강하게 준다. 관객은 전시장 벽과 같은 색으로 벽면을 뚫고 나온듯한 산등성이들이 에워싸는 내부의 봉우리들 사이로 움직이게 된다. 그뿐 아니라 관객은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 출력된 이미지를 산등성이 곳곳에 배치함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거의 동시적으로 추체험하게 된다. 임택의 작품은 산수를 설치로 풀어낸 아이디어나 그것을 받혀주는 조형적인 능력도 감탄할 만하지만, 미디어화와 완전히 일치되어 가는 현대인의 경험을 다룬다는 점이 더욱 주목할 만하다.

 

가령 처음 보는 대상을 눈으로 살피거나 몸으로 겪기 보다는 가지고 있는 사진기부터 들이대는 것, 어디에 가서 우선적으로 하는 일이 근사한 배경이 될 만한 것 앞에 사진을 찍는 일이라는 것, 어떤 체험이 기록되기 보다는 기록 행위 그 자체가 체험이 되는 것, 어떤 행위와 그 결과물 사이의 시차가 점점 줄어들어 즉석에서 모든 것이 확인되고 의미 부여되며, 이러한 즉각성 자체가 즐겨지는 문화가 그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 사진의 시대 이래로, 한 두개 이상의 복제 기기들로 무장한 네티즌들이 꾸리는 블로그나 디시인사이드 싸이트 등에서 확인되는 디지털 문화의 양상들이다. 즉각적인 상호작용 시대의 문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임택의 작품에서 관객은 그럴듯한 풍경 앞에서 행하는 것처럼 사진을 찍고 찍히면서 작가가 만들어 놓은 무대장치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임택의 ‘옮겨진 산수’는 일반적인 산수화처럼 무아경을 추구하는데, 그가 연출한 풍경 자체가 무아경이기 보다는, 그것의 커뮤니케이션의 측면이 무아경적이다.

 

현대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커뮤니케이션의 무아경]에서 현대사회가 분명한 사실, 본질, 실체, 사용가치로서의 대상을 사라지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경향이 모든 것이 물질화되는, 철저히 합리화된 교환 경제의 결과라는 것이 역설적이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이 모든 본질적인 세계--투사적이고 상상적이며 상징적인 세계--에 대한 설명은 여전히 주체를 반영하는 거울로서의 대상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장면scene과 거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스크린과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거울과 장면의 반사적인 초월을 대신하여 무반사적인 표면, 즉 작동이 이루어지는 내재적인 표면, 커뮤니케이션의 유연한 작동표면이 존재하게 되었다. 커뮤니케이션의 즉각성은 인간의 의사 교환을 순간의 연속으로 축소화시켰다. 보드리야르는 모든 기능이 단 하나의 유일한 영역인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으로 폐기되는 것, 의미가 미디어 스스로의 공회전 속에서 생성되는 현대 문화의 경향을 커뮤니케이션의 무아경이라고 명명한다.

 

소통의 즉시성이 야기하는 무아경과 고독, 그리고 자기도취가 현대문화의 주요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쾌락은 더 이상 현현이나 경관, 미학적인 쾌락이 아니라, 순수한 환상과 우발성과 향정신성의 쾌락이다. 임택의 작품은 실제의 경치나 그것의 표현에서와 같은 흥분이 아니라, 차가운 환상을 야기한다. 환상과 무아경에 의해서 열정은 사라진다. 완벽하게 복제된 앞면과는 달리 평평한 허연 뒷면을 가지는 임택의 작품 속 인간들과 대도시의 나무라고 할 수 있는 전선줄 나무들도 실제의 사라짐도 예시하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텔레비전으로 대변되는 스크린의 이미지와 더불어 우리 자신의 육신과 모든 주변세계는 일종의 조정 화면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현실 그자체는 거대하고 쓸모없는 몸체로서 나타난다. 몸체, 경관, 시간 등 모든 것은 점진적으로 하나의 장면으로서 사라져 버리게 된다. 공공의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적인 것의 무대와 정치적인 것의 무대는 모두 점점 더 여러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하고 유연한 몸체로 축소된다.

 

이 시대는 축소화의 시대이다. 모형같은 임택의 작품은 환경의 트랜지스터화를 표현한다. 축소화는 집중적인 효과를 위한 것이다. 축소되고 즉각적으로 사용 가능한 효과가 있을 뿐이다. 임택의 작품 곳곳에 놓인 천진하고 발랄하기 그지없는 관객들의 다양한 포즈는, 대자연에 마주한 인간의 실존성 따위와 관련된 산수화의 미학과는 거리가 있다. 거기에 있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즉각성이 야기하는 무아경 속에 빠진 테두리 없는 주체들이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의 커뮤니케이션 문화 속에서 개인자신의 육신은 물론 개인적인 보호를 위한 신성한 분위기도 없다고 단언한다. 방어나 후퇴가 없는 감정, 내면성의 종말이다.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더 이상의 저항도 없이 서로 접촉하고 발산하고 관통하게 된다. 새로운 정신분열증 환자라고 할만한 현대인들은 모든 장면을 박탈당한 채 커다란 혼란 속에서 생활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에 노출되어 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존재의 한계를 만들 수 없고, 더 이상 배역을 맡거나 스스로를 무대에 올릴 수 없다. 그는 이제 순수한 화면, 모든 네트워크의 영향이 교차하는 중심일 뿐이다.


이선영(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