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cophony : Shuffle Cards
 
Kim Ji-Won
 2009. 4. 13 - 5. 16

사물의 내부에서 해독제 찾기,

혹은 사물과 사물의 내적 질서를 동시에 포용하기

 

1. 먼 길을 돌아 온 후, 이젠 ‘그림 읽기’조차 분열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김지원의 그림만 해도 그렇다. 그것들에서 어떤 이는 ‘회화의 위기’나 ‘회화의 불안’을 읽고, 어떤 이는 상반되게도 ‘비로소 가능해진 회화’를 읽는다. 또 다른 이는 그것들이 ‘그리기에 대한 리비도적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모두가 자기 식으로 지드나 프로이드를 모셔오는 이러한 ‘다양함’으로 인해, 어떻든 분명한 한 가지 결과는 직업적인 그림읽기가 점차 신망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늘상 그렇게 산만한 것만은 아닌데, 예컨대 그린버그 씨(氏)에 기댄다는 불문율에선 무척 흥미로운 일치를 보인다. 김지원 읽기에 관해 앞서 언급한 몇몇 예 외에도 많은 읽기들이  ‘회화’보다는 ‘회화 자체’에 주목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같은 그림읽기는 언젠가 그린버그 씨(氏)가 칸트를 받아 말한 바 있던 ‘자기지시적 회화’이념을 곱씹어 온 습관이 은연중 몸에 밴 탓일 것이다.  

 

하지만, 굳이 회화 자체여야만 했을까? 즉, 여전히 김지원의 그림들이 회화 자체라는 메타-네러티브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이 그토록 중요한 일일까? 회화 자체의 내러티브가 회화의 내러티브들을 끝장 내온 역사를 환기한다면, 오히려 얘깃거리들이 차고 넘치는 김지원의 회화야말로 회화 자체의 내러티브를 저해하는 요인들로 가득 한 퇴행의 산물쯤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김지원의 세계에서는 미술사적 내러티브를 전망적으로 거론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소문자로 시작되는 작고 예민하며 마음을 끄는 이야기들에 주목하는 것이 더 의미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김지원은 바닥에 털석 주저앉아 가슴을 쓸어내리는 자신을 드로잉한 다음, 얼굴 옆에 ‘나약함, 나약한’이라고 적고 있다. 작가의 고단한 삶의 윤곽이 선명하게 설정된다. 그 대각선방향으로 아래쪽에 배치된 또 다른 드로잉엔 밥통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누렁이 한 마리와  ‘욕심을 극도로 죽이는 법’ 이란 문구가 눈에 띤다. 그뿐인가. 그는 자신의 그림 안에서 거인국의 이방인처럼 주눅들어 있고, 그림 밖으로 내동댕이쳐지기 일쑤다. 반면 하찮아 보이는 정물들은 거대하게 클로즈업되곤 했다. 나는 그가 그림의 구석, 혹은 구석을 그린 그림에 깊이 애착해오는 것을 이와 같은 자전적 맥락에서 지켜보아왔다. 또 김지원은 하필이면 왜 그토록 ‘막힌 벽’과 오갈 데 없는 시선의 교착을 그려야 했을까? 
 

김지원은 그림 안에서나 밖에서 끊임없이 억눌리고, 갇히고, 왜소해지고, 추방되고 소외된다. 이 정도면 회화의 불안 이상으로 김지원의 불안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회화의 콤플렉스가 아니라, 회화하는 주체의 그것을 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에서 김지원 회화를 훨씬 더 내밀하게 읽는 것이 가능해지리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가 단지 ‘여전히 건재한 회화’를 입증하기 위해 그 많은 고백들을 동원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게 김지원의 회화들은 회화 자체를 담론화하는 거대 내러티브의 종말 ‘이후’의 사건이다.

 

2. 지난 3,4 년 이래 김지원은 마치 맨드라미 화가 같다. 한 여름 흐드러지게 피었던 때부터 처연히 속살을 드러낸 겨울 초입에 이르기까지, 김지원은 맨드라미가 가득한 정원 밖으로 나올 줄을 모른다. 그리고 마치 한 해의 유일한 수확인 것처럼, 여름을 난 그의 아틀리에는 온통 맨드라미를 그린 캔버스들로 가득하다. 그의 관념만큼이나 신체도 맨드라미들로 덮여있다. 맨드라미의 진한 레드핑크 빛을 사랑하고, 그것의 꿈틀거리는 생(生)에 경탄한다. 작가는 맨드라미에 깊이 빠져있다. 회화는 이런 감정들을 추스르고 하나로 엮는, 작가에겐 유일하게 가능한 해결책이다.  

 

김지원에게 맨드라미는 시선의 욕망에 부응하는 관상용이 아니다. 작가는 맨드라미가 꽃잎을 내는 방식, 그 꽃잎의 격한 구불거림에서 느꺼운 동물의 신체를 느낀다. 그리고 그토록 활기차게 살고 처절하게 죽어가는, 생의 그 고유한 방식에 감탄한다. 여름 내내 이글거리다 이내 무너지듯 녹아내리는 색과 형태의 그 격렬한 소멸과정이야말로 그럭저럭 한 생을 살다가 가는 우리의 것들보다 훨씬 더 극적이라는 게 김지원의 관점이다. 그는 맨드라미를 막힌 담과 파손되고 버려진 인형 위에서도 건재한 것으로 그림으로써,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경의를 표한다.


맨드라미를 그토록 살아있게 하는 어떤  내재하는 질서, 일테면 ‘생(生)의 의지’같은,  아니면 ‘생의 도약이 극적으로 입증되는 순간들’, 바로 이것이 김지원이 포착하고 싶어하는 바다. 이로 인해 김지원이 그린 맨드라미는 색과 형태의 성실한 재현인 동시에 그 이상인 것이 된다. 그의 터치들은 맨드라미의 육감적인 꽃잎에 충실하면서도 그 자체로 춤추듯 활력이 넘치고 변화무쌍하다. 맨드라미를 둘러싼 또 다른 풀들의 단속적이고 예리하며 임의로 교차하는 숱한 터치들은 맑은 날 정원의 한갓진 일과의 묘사이기도 하고, 부산스럽고 충만한 생의 징후들에 대한 예민한 포착이기도 하다. 그것들의 색 또한 재현적인 동시에 추상적이다. 따라서 작가의 그림들은 분명 맨드라미 정원의 재현이면서, 또한 생의 극적인 입증들의 상징적 수집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듯, 김지원의 회화는 재현적 묘사와 내적 표출의 포착 사이의 섬세한 갈등에 의해 조율되고 있다.

 

노년의 램브란트가 그랬고, 에공 쉴러나 코코슈카도 그랬다. 물론 김지원의 것이 그것들보다 훨씬 가볍고 경쾌하긴 하지만, 반 고흐와 뭉크도 이 계열에 동반할 수 있다. 이 사랑스러운 화가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마주했던 것들이 무엇이건-사물이건 관념이건, 사건이건 추상이건- 그것들에 지독하게 충실했으며, 결국 그것들의 어느 한 부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충실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1650년경부터 램브란트는 모델의 외양을 거의 무시하는 수준에 도달했고, 1917년경의 코코슈카는 대상을 오로지 내적 에너지의 단위들인 붓터치들로 분해하기에 이르렀다. 또 그렇게 쉴러도 모델의 내면에 깊이 박힌 우울을 불안스럽게 흔들리는 터치들로 옮겨놓을 수 있었다. 이 화가들이 동일하게 깨달은 것은 어떤 대상이건 그것엔 관찰자를 걸어 넘어뜨리는 독(毒)이 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코코슈카는 자아의 해독을 위해 보다 내면의 심상에 몰입할 것을 권한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사물의 해독을 위해 사물의 내면에서 백신을 찾아내는 것 같은 어떤 과정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김지원이 그린 맨드라미에서도 이같은 행간이 읽혀진다. 그것들 역시 맨드라미로부터 출발했지만, 결국 여름 내내 맨드라미를 타오르게 했던 그 기적적인 생의 의지에 더 방점이 찍힌, 그같은 맨드라미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3. 하여 김지원의 맨드라미는 보여지는 그대로의 맨드라미인 동시에 결코 그렇게 보여지지 않았던 맨드라미이기도 한 것이다. 사물의 양면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는 그림을 대하는 김지원의 근원적인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사실 작가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는 것/그리는 것에 가려지는 것들’, ‘그려진 것/그려진 것에 가려진 것’을 동시에 포용해 왔고, 그것은 때로 ‘자신이 그리는 것’과 ‘그리는 자신’을 통시적으로 인식하려는 시도로 확장되었다. 이때 그림은 사물과 사물의 내적질서를 동시에 수용하는 창고인 동시에, 그 사물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주체가 드러나는 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캔버스는 사이의 공간, 간주관(間主觀)적 인식의 장으로 설정된다. 즉, 대상과 인식된 대상, 그리고 인식하는 주체가 한 데 뒤섞이는 일종의 교차로 같은 것으로 말이다. 그의 <그림의 시작-구석에서> 연작을 보자. 그림 안에는 또 다른 그림이 있는데, 그것은 이미 인식된 것과 인식되고 있는 것 사이의 간공간(間空間)을 암시한다. 이 인식된 것과 인식되는 것 사이에 작가 자신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자신 역시 그러나 이번엔 그림에 의해 인식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다층적인 인식공간 안에서 그림과 주체, 객관과 주관은 상호간섭적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그리는 동시에 그려지고, 그림은 인식되는 동시에 인식한다. 나는 작가가 구석을 선호해왔던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은 맥락일 것으로 이해한다. 구석이야말로 두 개의 벽과 바닥이 상호 교차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의 세계와 그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간주관(間主觀)을 보다 통합적인 하나의 전망 안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 맨드라미와 그것의 내적 속성과 그 둘 사이를 오가는 인식을 하나의 공간에 함축시키는 것, 이것야말로 김지원의 회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미학적 사유일 것이다.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대교수)

 

 

무거운 그림, 가벼운 그림
                                                           
김지원이 서울의 대안공간 풀에서 〈정물화.화〉(6.13~24)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열었다. 바로 얼마 전 경기도 광주의 영은미술관이 기획 초대한 〈그리는 회화-혼성회화의 제시전〉(5.29~7.20)에서도 그의 작업을 볼 수 있었다. 김지원은 작업의 양이 많은 작가다. 방대한 작업의 양은 그의 작업방식에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시선과 기록(혹은 그리기)에 의 파편적이고 빠르고 얇고 중성적인 것, 구석으로부터 혹은 바깥으로부터 바라보기, 미끄러지기, 기억에 대한 강박과 그것의 비건축적(비구축적) 방식의 축적, 그림에 대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의심과 거리 두기 등 말이다. 그러나 비물질적, 메타회화적 태도와 속도, 의심, 회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회화에는 항상 물리적․회화적 실재로서의 매혹이 있다. 어쩌면 이 둘의 공존과 간극이 주는 긴장이 그의 회화가 매력을 발산하는 지점이고 또한 그의 작업에 담기는 미학성과 내용성 그 자체가 되고 있는 거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번 전시 역시 그 점에서 예외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정물화.화〉라는 전시 제목이 이미 그 점을 교묘히 함축하고 있다. 즉 (정물화라는) 회화적 작업의 쾌락과 그것으로부터의 거리 두기 말이다. 전시작은 두 부류인데 하나는 130×194cm 크기의 캔버스에 아크릴릭으로 그린 󰡐정물󰡑화들이고 다른 하나는 종이에 그린, 혹은 기록한 작은 드로잉들을 모아 설치한 것이다. 아크릴화 대작들은 대개 양치하는 컵, 인스턴트 커피 조각, 군용 귀마개, 고장난 수도 부속, 동물 같은 식물, 장난감, 깨어진 그릇조각 등 일상의 하찮은 물건들을 그린 것으로 대체로 화면을 꽉 채우는 크기로 확대해서 그린 것들이다. 드로잉들은 볼펜과 수채로 그린 것으로 작가 자신의 일상과 기억, 생각과 시선의 파편화되고 가볍고 자유로운 흔적이고 내밀하며 심리적 환기력이 높다. 영은미술관의 전시물들도 이와 비슷하나 맨드라미를 그린 중간 크기의 회화 연작이 추가되어 있었다.


영은미술관의 전시가 작품 내용이나 전시방식 측면에서 잘 기획된 연작 중심의 설치전 느낌을 주었다면, 풀에서의 전시는 대작 회화들이 더 많이 출품되었는데 외형상 약간 단조로운 (다소 막막한 느낌이 드는) 보통 회화전에 가까웠다. 이것은 전시공간의 물리적 차이에서 기인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나, 그보다는 정물화라는 장르 자체가 주제적 의미보다는 그리기의 관성과 회화적  쾌락에 더 관계되고, 그만큼 순수한 회화성이나 시각성에 더 종속되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정물화들은 1998년부터 지금까지 비교적 긴 시간 동안 해온 것(대체로 지속적이지만 간헐적으로 작업해 온 것)이고 본래는 작품 양도 많은데, 한정된 전시장 규모에 맞추어 일률적 크기의 대작 회화 몇 점만 걸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도 기인하는 듯하다. 그것이 더 막연한 느낌을 주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점이 김지원의 작업에서 넘치는 회화성을 가리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아크릴릭화 대작들은 그의 회화성에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그리는 방식과 솜씨는 무심하고도 치밀하다. '무엇을 얘기하려는 것인가' 하는 일반적 의문을 접어 두고 볼 수 있다면 이 회화들은 우리에게 당연히 큰 쾌락으로 다가온다. 특히 김지원식 그리기란 것이 있어 그 쾌락은 아주 각별한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역시 그 면에서 진일경을 보인다. 그리기 대상의 선택에서도 그렇지만, 그 작고 평범하고 볼품없는 사물을, 그 표면과 물질성을 짐짓 무심한 듯이 아주 평등하고 꼼꼼하게 그리는 방식에는 거의 초현실적인 현대성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작업이 내뿜는 회화적 '아우라' 혹은 '숭고미'도 이에 관련된 것임은 물론이다.

백지숙이 말했듯이, 이 숭고미란 것은 회화적 전통의 전유에 기반한 유연성과 전면성의 재입력에서 온다는 것, 그리고 김지원의 그림은 이 숭고성을 일상의 비속하고 하찮은 사물들과의 회화적 조우에서 이루어낸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 비속한 사물들은 가볍고 무심하고도 지독하게 충실한 그리기에 의해, 그리기의 연장과 그 밀어붙임에 의해 표면의 물질성과 표피성이 극도로 확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 표피성과 가벼움(상투적 일루전을 일부러 배제하는 듯한, 사물의 표면을 그냥 회화적으로, 물감과 붓질로 스캐닝한 듯한)이 역으로 그의 작업에 독특한 새로운 깊이를 부여하는 것이다.


정물 그림은 일반적으로 묘사의 충실성을 드러낸다. 그런데 김지원의 경우 그 충실성이란 거의 주관성이 배제된 스캐닝 같은 충실성이고, 하찮고 지겨운, 그리고 반복적인 그 무엇이다. 그리고 이 점이 그의 작업에 기묘하게 긴장된 방식으로 시와 초현실성을 만들어 낸다. 때로는 미학, 사회, 일상이 교묘히 맞물린 심리적 환기를 준다. 수년 전 경주 선재미술관에서 가졌던 그의 전시 명제이기도 한 〈비슷한 벽, 똑같은 벽〉의 핵심도 이와 동일하다. 이것은 동일성과 차이, 닮음과 반복에 관계된 문제이기도 하다. 그의 노동과 움직임은 회화의 무거움과 가벼움 양쪽에 걸쳐 있다. 이 양자간을 왕복하면서 그는 이 왕복운동 속에 자기 자신의 (화가로서의) 실존의 형식과 회화에 대한 질문과 회의, 그리고 그것의 재의미화의 궤적을 독특하게 중층적으로 담아 낸다. 질문이란 평온함이 보장되지 않는 이 세계와 그 속에서의 회화의 역할과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는 화가의 자만이나 자아도취의 무거움, 거창한 자가 최면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작가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히려 가벼움을 통해 현실의 일상 너머 그 이면의 감추어진 무의식을 드러내고 또한 자기의 실존에 대한 자의식도 드러낸다. 가벼움만이 아니다. 파편적인 것, 강박적인 것, 기억과 연상의 동시성, 미끄러지는 것, 표면에 붙어 바깥쪽으로 도는 것(비눗방울처럼), 거리 두기, 중심이 없는 축적 등 그 방식은 여러 가지 양상을 띤다.

또 한 가지 빠트릴 수 없는 것이 그의 작업의 사회 심리적인 환기력이다. 그 내용과 강도가 일정하지 않고 들쭉날쭉한 것이긴 하지만 그의 작업에는 우리의 사회적 삶의 형식과 생존의 분위기, 특히 그것의 기이함과 낯섦, 엽기성과 부조리함에 대한 환기력이 있다. 초기작 〈현재진행형〉이나 1991년의 회색그림 연작, 그리고 실내와 도시와 풍경을 그린 여러 〈심리적 도상〉 연작들, 1998년의 〈휴- 일상〉 연작이나 〈일상〉 연작, 그리고 〈똑같은 벽, 비슷한 벽〉의 공통점이 이런 사회심리적인 환기력이다. 심리적 환기의 동시성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그의 작업은 회화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할 수도 있다. 모든 영화의 이미지는 이미 그 자체로 심리적인 풍경이다. 그의 작업에는 바로 이와 같은 심리적 환기력이 있다. 그것은 미묘하고도 초현실적인 것이기도 하다. 김지원의 작업이 갖는 보편성의 한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화가로서의 그의 실존에 대한 도덕적 질문이라는 것도 이런 측면을 배제하고서는 제대로 존립할 수 없다.

 

김지원이 그림을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의 한국사회, 그 무겁고 답답하고 불안한 세계, 짓눌리고 소외된 세계와 더불어서였다. 그의 초기작에 나타나는 무거운 공기와 신선하고 가벼운 저항적 해학의 공존은 이런 시대적 배경과 관계가 있다. 가벼움, 재치, 해학. 다소 음험한 생기와 풍자적 반어법. 그의 시선은 여행자처럼, 외부에서 온 발견자처럼 당시의 그 소외된 사회 공간의 표면을 유쾌하게 미끄러지면서 그 속에 감추어진 사회 심리적 풍경을 정확하게 포착해내고 있었다. 그는 현실을 항상 신기해하는 관찰자이고 발견자였으며 지금도 그렇다.
초기작부터 두드러지는 그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가 공간을 읽는 방식이 자유롭고 유동적이고 기호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공간과 그 체계의 역설적 의미를 잘 읽어낸다. 또한 그 유동성만큼 방관자적이고 해학적이다. 때로는 절묘한 풍자적 해학을 보여 주기도 한다.

 

독일 유학(1988~1994) 이후 그의 그림에는 역설과 냉소가 예전과 동일하되 뭔가 개념주의적이고 '메타회화'적인 자기 성찰과 자기 유희 쪽으로 전환된 느낌이 든다. 작가 자신과 회화에 대해 불안한 의식과 초현실성을 아울러 표현하는 것이 그의 작업에서 지속적인 한 축이 되기 시작한다. 이 작업들에는 1980년대와 비슷하나 다른 종류의 불안이 깔려 있다. 1980년대의 그것이 메시지 차원이라면 1990년대의 그것은 '그림 자체의 존재 이유'라고 하는 질문들에 더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그 질문이란 재현에 관한 것이나 '그림 그리기'에 관한 것('메타회화'적 질문)일 때도 있고, 또는 예술가의 신화(독창성, 천재적 개인)나 제도에 관한 것일 때도 있고(미술사적, 제도론적 질문) 혹은 대중문화시대 내지 전자영상시대(비디오스페르)의 그림의 존재 방식에 관한 것, 혹은 전시방식에 관한 것일 때도 있다.

 

독일에서의 편집적인 사진이미지 수집과 비축활동, 그리고 편집적인 열정으로 지금까지 수행하고 있는 일상의 기록으로서의 메모와 드로잉. 파편화된 세계, 파편화된 기억의 수집, 그리고 '메타 화'적인 성찰. 이런 것들은 냉소와 미끄러짐, 무력감을 항상 동반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너무 반복적이기도 하다. 마치 비눗방울의 표면을 미끄러지듯이 이 자의식은 이 세계의 현상의 표피를, 그 닮음과 반복, 그 불길하고 차가운 텍스처의 결을 따라 돌 뿐이다.

'회화 자체의 불안'이란 무엇인가. '예술의 신화가 사라지고 난 대중문화 세상 속에서의 전략적 그림 그리기'(작가메모, 1992)인가? 〈그림의 시작 - 구석에서〉 연작이 보여 주는 '그림 속의 그림'이 그것인가? 그는 자신의 그림이 캔버스의 정면이 아닌 측면을 의식하고 그린다고 말한다. 구석으로부터 시작하는 그림이란 뜻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요컨대 그리는 행위에 대한 불안과 자의식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런 특징들이 가치의 형성으로서의 그림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다시 포괄적 질의가 필요할지 모른다. 회화에 대한 질문과 자기 회의가 회화의 '신선함'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이 시대 문화의 독특한 역설이다. 그러나 '회화에 관한 회화'는 오늘날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신화로서, 있어야 할 또 하나의 성찰, 더욱 보편적인 성찰에 대한 알리바이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 될 때가 있다. 화가의 '메타회화'적인 자기 질의와 회의가 무력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적어도 그 질의와 성찰이 제대로 구조화되지 않을 때 말이다. '제대로'라는 것은 '정치적․미학적 그리고 역사적‥으로라는 말이다. 이 구조화를 불가능하는 무력증이 무엇인가 잘 살필 필요가 있다.

나는 〈정물화. 화〉전에서 한편으로 그 작업의 회화성에 감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매혹이 의미의 문제 앞에서 증발되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말해 이 그림들이 의미의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그것을 초월한 듯한 느낌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어떤 막막함을 느꼈다. '그림에 관한 그림', '그림에 대해 회의하는 그림'이 어쩌면 한 문화와 제도의(현대미술이란 제도의) 자기 최면이 아닌지를 비평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림은 놀이이고 쾌락이지만 한편으로 인식의 세계이며 심리의 세계이고 비평의 수단일 수가 있다. 가치론적인 것, 의미의 형성, 의미의 발화, 그것은 언제나 그림의 중요한 덕성이다. 그림은 그것을 통해 시대와 사회 속에서 호흡했다. 물론 그림은 놀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논다 해도 정말 잘 놀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림을 재구조화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방식이 꼭 그림에, 회화 그 자체에 머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림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다. 제도 또한 선험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의미의 문제나 전달의 문제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대중문화의 막강함 앞에서 회화와 예술의 자기 질의가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질의 방식은 새로워야 할 것 이다. 작가의 자의식도 변해야 하고 재구조화되어야 할지 모른다. 김지원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가벼움이 이런 새로운 성찰도 포함하는 것이길 기대한다. 재구조화는 언제나 흥미로운 과제다. 길은 하나가 아니고 다양하다. 문제는 필요한 만큼의 역사적, 미학적 성찰과 예술로서의 강도를 가졌는 가이다.

 

성완경(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