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cophony : Shuffle Cards
 
Lee Jae-Hyo
 2008. 9. 8 - 10. 11

물질과 형태의 화해

 

자연에 바치는 경의

 

이재효의 초기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자연을 거슬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연에서 채집한 돌을 공중에 매달아 큰 구체(球體)를 만든 <0121-1110=191111>로부터, 돌로 공간에 원을 그린 <0121-1110=193061>, 그리고 풀잎을 모아 경단모양의 공을 만든 <0121-1110=194051>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환경친화력이 높은 까닭에 생태를 존중하는 그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0121-1110=191111>의 경우 붉은 색과 파란색의 반원을 서로 결합시켜 마치 태극문양을 도형화한 듯한 소토(Soto)의 파이프작업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공간에 돌로 원을 그리거나 풀잎을 모아 공을 만든 작업은 골드워시(Andy Goldworthy)의 작업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형태와 방법의 유사성이 두드러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재효의 작품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0121-1110=191111>의 경우 정밀한 계산에 바탕을 둔 소토의 작업이 공간과 시간을 통합하려는 의도로부터 출발한 것이라면 이재효의 작업은 육중한 돌로 만든 공을 어떻게 공간에 띠울 것인가 하는 중력의 문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런 관심이 훗날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구에 의해 구체화되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뒤이어 나타날 그의 작품을 예견하게 하는 실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자연생태에 순응하는 작업은 꼭 골드워시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미술관을 최후의 안식처로 받아들이는 물신숭배 현상이 팽배해지고 예술의 상업화가 가속화되는 것에 반대한 예술가들이 개념적인 행위예술, 대지예술에서 해결점을 찾고자 했으나 스미슨(Robert Smithson)의 <나선형 방파제>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자연 속에 거대한 구조물을 세운 하이처(Michael Heizer)의 작업이 대규모적, 물량적일 뿐만 아니라 환경에 대한 난폭한 개입의 방식이 오히려 자연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불러일으켰다. 그런 중에 나타난 롱(Richard Long)이나 오펜하임(Dennis Oppenheim), 골드워시 등은 자연을 학대하지 않는 작업을 통해 대지예술이 자연친화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이끈 예술가들이었다. 자연에서 채집한 재료로 작업을 하고 시간에 의해 그것이 자연 속으로 되돌아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대지예술의 이념에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재효의 초기 작업은 이들 자연친화적이고 환경생태를 역행하지 않는 대지예술가들이 지녔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으로 향한 경의가 작동할 때 진정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재효의 작업이 비록 상당한 시간의 노동을 투입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작업에서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은 보기에 따라 무질서 하고 난폭하지만 그것이 지닌 자생력의 원천을 이재효는 구에서 찾고 있다. 원은 상징적으로 상생, 완전성, 만물의 근원과 긴밀하게 연관된 도형이다. 이 원을 입체로 구현할 때 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의 알갱이가 이 원초적인 둥근 입체로부터 비롯된다는 상징성이 그의 작업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구를 가능하게 만든 출발점일 것이다.

 

팍투라의 부활, 물질의 현시(顯示)

 

이재효가 주로 사용하는 재료는 나무와 철이다. 이 재료에 특별한 행위를 가하지 않을 때 그것은 ‘발견된 물체(objet trouvé)’이거나,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날것’으로서의 자연의 제시에 그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재료에 대한 학대란 표현이 과도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노동을 투입하며 재료와 투쟁한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구, 반구, 입방체와 같은 단순하며 말 그대로 기본적 구조(primary structure)를 지닌 형태이다. 때로 이 구조는 세포분열하듯 동일한 형태를 반복적으로 증식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관심이 미니멀리즘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재료에 가해진 과도한 노동과 정형적인 형태는 자연에 가깝다기보다 인위성이 높기 때문에 그가 추구하는 자연과 역행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보면 재료를 가공하여 재료의 물성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생생한 결을 더 부각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작업방식은 팍투라(faktura)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원래 ‘건축의’, ‘구조의’, ‘축조의’란 뜻을 지닌 팍투라는 1912년 뷰를류크(David Burliuk)와 라리오노프(Mikhail Larionov)가 사용한 이래 말레비치(Kasimir Malevich), 리시츠키(El Lissitky), 포포바(Lyubov Popova), 타틀린(Valdimir Tatlin) 등과 같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 의해 확산된 개념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생산주의 이론가 집단이 부상하면서 팍투라는 라틴어로 제작방식을 의미하는 ‘텍토닉(tectonic)’과 함께 구축주의(Constructivism)의 주요 개념 중 하나로 떠올랐다. 마침내 구축주의 예술가이자 이론가인 알렉세이 간(Alexei Gan)은 1922년에 발표한 ‘구축주의’란 글에서 팍투라란 ‘물질을 다루는 모든 과정’이며 텍토닉은 ‘새로운 내용과 형식의 종합을 추구하는 구축주의자들의 실천을 인도하는 원칙’으로 규정했다. 이 시기에 러시아 전위예술가들에게 팍투라와 텍토닉은 사회주의 예술의 변증법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자, 생산주의자를 지향했던 러시아 구축주의자들의 사회주의적 이념에도 불구하고 재료가 본래 가지고 있는 성질을 실현하기 위해 제작과정 중에 재료의 특수한 조건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훗날 재료를 전면적으로 부각시키고자 한 현대미술가들을 고무시켰음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미니멀리즘은 러시아 구축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경향으로 볼 수 있다.
팍투라는 이재효의 작품에서도 부활하고 있다. 구체를 만들기 위해 전기톱으로 나무의 표면을 켜서 형태를 만드는 작업과정은 매우 인위적이지만 그것을 통해 나무의 물성이 전면적으로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나무줄기들을 쌓아올려 구체를 만들기 위해 먼저 이 나무들을 고정시켜야 한다. 그런데 나무를 고정시키려는 용도로 사용한 못이나 철근이 도출되는 것은 작가에게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그 결과 나무를 결합하려는 용도로 사용한 못을 아예 노출시키는 작업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는 나무작업으로부터 못작업으로 발전한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지금은 반대로 못만 돋보이게 하고 있다. 무수히 많은 못을 나무에 박아서 휘고, 갈고 한 다음 나무를 태워 못이 돌출되게 함과 동시에 나무가 가진 나이테나 색상을 까맣게 변화시킨다. 그러면 까만 숯 덩어리 위에 금속성의 반짝이는 못만 두드러져 보인다.”

많은 나무를 쌓고 전기톱으로 그 표면을 잘라내며 구를 만드는 작업이든, 나무의 표면에 무수하게 많은 못을 박은 후 나무를 태우고 돌출된 못을 그라인더로 갈아내는 공정이든 다 같이 거의 자기를 비워내는 것에 버금가는 노동의 양을 요구한다. 자기를 비워낸다는 것이 작가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몰아지경의 작업을 통해 그의 존재가 작품과 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거리를 둠으로써 형태의 명료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형태의 구체성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표면에 의해 다시한번 변증법적인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말하자면 형태에 의해 재료의 물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유지한 채 재료와 형태가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형태가 물질을 현시(顯示)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의 승리

 

이제 이재효의 작업에 나타나고 있는 특징을 정리해 보자. 그는 반복적인 노동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흔적과 그 결과를 중요시한다. 견고한 형태는 그의 이러한 지향성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러나 그는 물질의 특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형태를 기하학적인 것으로 최소화한다. 그래서 나무의 경우 나무의 결이 생생하게 살아나도록 나이테를 노출하고 있으며, 철을 사용할 때는 그 질감을 드러내기 위해 투명성이 높은 정도까지 표면을 갈아낸다. 그런데 물질의 성질이 전면적으로 드러날수록 기하학적 입방체를 구성하고 있는 결 역시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므로 물질이 이러한 구조에 의해 가려지기도 한다.
굵거나 가는 나무줄기를 모아 공과 같은 입방체를 만드는가 하면 나무에 무수하게 많은 못을 촘촘하게 박고 거의 숯이 될 정도로 나무를 태운 다음 그 못의 표면을 그라인더로 갈아내는 집요하고 거의 편집적인 작업과정은 이 작품의 핵심이 물질에 있음을 은폐할 수 있으며, 더욱이 결과는 공 모양이나 육면체처럼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단순한 입방체로 나타나기 때문에 물질은 가려지고 형태가 전면으로 돌출된다. 이재효의 이러한 입방체는 미니멀리즘을 연상케 한다. 그의 작품을 미니멀리즘과 연관시키는 것은 가치평가를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작품에 나타난 특성을 보다 객관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근거의 하나로 언급했을 따름이다. 그래서 미니멀리즘이 물질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의 존재를 작품으로부터 지워버림으로써 러시아 구축주의에서 말한 ‘팍투라가 생생하게 살아나도록 하는 반면에 이재효는 작업의 공정에 투여한 노동의 흔적이 작품에 나타나도록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입방체를 구성하고 있는 성긴 구조나 그라인더로 연마된 못이 만들어내는 복잡하고 조밀한 표면을 통해 자신의 관심이 미니멀리즘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입방체의 반복과 증식, 물성의 강조, 작가의 주관이 개입할 여지를 최소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미니멀리즘과 은밀하게 조우하고 있다. 이런 논리는 그의 작품에서 형태가 물질을 추월할 때 물질이 형태의 구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표면 밖으로 튀어나온다는 점에 의해 지양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형태와 물질이 충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충돌은 그의 작품을 형태나 물질 어느 한 면으로만 해석하려 할 때 그 전체를 파악하기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 둘은 변증법적으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노동의 양이 형태의 승리를 약속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노동이 물질의 성질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그러나 양자를 화해시키는 것은 노동이다. 결국 그의 작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노동의 승리이다.

 

다시 자연으로부터

 

이재효가 만든 형태를 보면 완전한 정원(正圓)을 입체로 구현한 구 못지않게 변형된 구, 고리모양의 원, 원반 등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입방체라 하더라도 기하학적 완전성으로부터 다소 거리가 먼 구불구불한 표면을 지닌 것이 많다. 게다가 최근의 몇몇 작업은 나무처럼 성장하는 형태를 지닌 경우도 있다. 명쾌하며 군더더기 없는 입체에 비해 이러한 작업은 감성적이며 더욱이 형태를 구성하고 있는 구조의 복잡성은 차갑고 비인격적이며 비유기적인 입방체에서 느낄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나에게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힘이 없다. 단지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을 뿐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작은 사물이 관점에 따라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것을 정렬하지 않을 때 그 강도는 미약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정렬의 법칙을 그는 자연에서 찾고 있다. 노동의 양이 많아질수록, 그 강도가 높아질수록 그는 더욱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내버려진 상태가 아니라 복잡성 속에 질서를 갖추고 있는 그런 세계 말이다. 그래서 자연은 그에게 대결해야 할, 정복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고 배워야 할 작업의 원천이자 이유임이 밝혀진다. 자연을 존중할 때 그것은 물질과 형태가 투쟁하는 장이 아니라 화해를 위한 공간이 될 수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예술가에게 주어진 축복이자 과제이다.

 

최태만/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