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cophony : Shuffle Cards
 
Zuyoung CHUNG
 2008. 3. 17 - 4. 19

산 앞에서


정주영의 산 그림들을 본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
불암산
겹쳐진 붓질들
시원하고 신중하며 부드럽고 단호한 붓길들
묵중하고 맑은 색들의 운동
인왕산과 북악산과 북한산과 불암산 들이 정주영의 그림으로서 내 앞에 자신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산들은, 옛화가들의 산수화 속에서 그때그때 현재적 풍경으로서 자신을 드러낸 바 있는 바로 그 인왕산과 북악산과 북한산과 불암산 들이 아닌가.

정주영은 왜 이 산들을 그리는 것일까?
정주영의 산에 대한 끌림이 옛화가들의 산수에 대한 끌림 위로 겹쳐지고, 자신의 예정된 소멸을 절망적으로 의식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영원성에 대한 근원적 끌림 위로 또다시 겹쳐진다.
산은 인간에게,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면서도 나날이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 생생한 원형vivid archetype을 의미해 왔다. 인간이 산을 또는 산수를 그리는 것은 그러므로 순전한 자연에의 경이에서뿐 아니라, 유한한 실존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함으로부터, 유원한 본질을 자신의 실존적 현재 속으로 불러들이고자 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같다.
더 넓어지고자 함. 더 커지고자 함.
그렇다면 정주영의 이 산 그림들은, 옛화가들의 산수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원형적 현존성을 미적으로 추구해 가는 과정의 산물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정주영이 십수 년간 그려온 그림들을 따라가 본다.
김홍도, 정선, 이인문 등 17~18세기 조선시대 화가의 이른바 진경산수화를 표제화한 그림들로부터 출발하여, 오늘날의 지명과 사진을 첨부한 한강변 그림에 정선 당대의 지명을 표제로 부여한 <한수주유> 그림들을 거쳐서, 오늘날의 실제 산들을 직접 바라본 뒤 그린 <경계 위의 산> 그림들, 그리고 지금의 <활경> 그림들로 이어져 간다.
정주영은 삼사백 년 전 화가들의 그림을 참조하고 그들의 이름을 자신의 그림 속으로 불러내며, 그들이 직접 바라보고 그렸던 산들을 자신 또한 직접 바라보고 새롭게 그림으로써, 옛사람들과 자신의 본질적 같음과 실존적 다름, 삶의 원형적 지속과 역사적 단절, 찰나적 현존재에 담기는 살아 있는 영겁성에 대한 회화적 통찰의 길을 열어간다.

한 번의 붓질, 또 한 번의 붓질, 또 다른 한 번의 붓질......
정주영은 산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자신의 붓끝으로 불러내어 정교하고 튼튼한 시간의 직물을 짜려는 듯도 하고, 정주영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그 산들을 스치는 호연한 바람의 소리들을 묘사하려는 듯도 하고, 정주영은 바위산들과 자신의 다채롭고도 엄연한 마주섬의 생생한 아우라들을 구체화하려는 듯도 하다.
그리하여 정주영은 삼사백년 전에 살았던 그 화가들과 이 산들을 통해서 다시 만나려는 듯도 하다.

인왕산 그림들과 북악산 그림들과 북한산 그림들과 불암산 그림들.
정주영이 이 그림들에 붙인 큰 표제에 대해 생각해 본다.
활경.
이 말은 분명, 같은 맥락에서 더욱 널리 쓰이는 진경이나 실경이라는 말이 띠고 있는 풍경 혹은 풍경 이미지의 진리성이나 사실성과 관련된 분분한 시비의 뉘앙스를 별로 담고 있지 않다. 이 말은 풍경의 시간적 현재성과 경험적 직접성에 더 유념하도록 나를 이끈다. 그러니까 활경은 지금 내가 마주한 내 앞의 바로 저 풍경이며, 옛사람들이 그 옛날에 마주한 바로 그 풍경이며, 정주영이 자신의 시간 속에서 마주했을 바로 그 풍경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활경이라는 큰 표제어를 통해서 나는 다시 한 번, 일상과 예술에 맞물린 원형적 현재성이라는 미적 가치에 대해 그 어떤 사색을 시작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이제 나는 내 앞의 저 산을 바라본다.
산은, 이른 아침 안개비에 싸여 순한 능선만을 막막히 보여준다.
그러나 엊그제, 맑은 겨울 햇살과 바람을 받으며 골짜기의 깊은 굴곡까지를 힘차게 드러내 주던 한낮의 산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산은 날마다 다른 풍경으로 항상 저기, 내 앞에, 있다.
나는 날마다 그 산 앞에서 비질도 하고 걸레질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문득문득 정주영의 산 그림들을 떠올린다.

 

2006년 12월 7일 이른 아침, 박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