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rk Jong-kyu
 
Ha Won - media Installation
 2007. 12. 20 - 2008. 1. 26

<디지털 이클립스>

 

마크로코스모스를 향한 열린 공간

 

하원의 2004년 개인전 <디지털 이클립스 Digital Eclipse> (목금토 갤러리 2004.8.10-17)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상은 마치 기준점이 없는 허공에 던져진 듯한 느낌이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관객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점차적으로 어두운 공간 속으로 침잠하게 되는데, 검은 바닥과 천정, 그리고 흰 벽으로 이루어진 3층 전시장 내부에는 천정으로부터 바닥까지 하얀 줄들이 조밀하게 드리워진 스크린이 완만한 호를 그리며 겹겹이 늘어서 있을 뿐이다. 전시장 한쪽 끝에 설치된 영사기로부터 투사된 붉은 태양이 바닥에서 떠올라 스크린을 관통하면서 천정으로 지고, 반대편 끝에 설치된 영사기로부터 투사된 개기 일식 상태의 검은 태양이 바닥과 스크린, 벽, 천정을 스쳐가는 주기를 반복하고 있다. 타종소리, 바람소리, 폭포소리, 또는 땅의 울림과 같은 음향이 퍼지는 어두침침한 전시장 속에서 이처럼 태양이 3분여 간격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을 계속 지켜본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관객들은 무엇보다도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 어떤 지점을 점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데, ‘작품’과 ‘배경’을 분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공간을 지배하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쉽게 파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설치 작업이 주류로 떠오른 20세기 이후의 미술 현장에서 이러한 상황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관객을 참여시키려는 미술가의 노력은 작품의 공간과 관객의 공간이 서로 만나게 하려는 시도로 집중되었으며, 과거와 비교할 때 관객들은 더 많은 자유와 권한을 지니게 되었다. 프레임 속의 회화 작품, 받침대 위나 벽감 안에 설치된 조각 작품, 그리고 관람석과 분리된 무대 막 위에 투사된 영상물 등은 완결된 하나의 소우주로서의 세계, 즉 미크로코스모스 (μικρόκοσμοϛ)인 동시에 이를 대하는 관객은 타자로서의 거리를 유지하고 독립적인 입장에 서 있을 수 있었다. 반면에 전시장을 찾는 현대의 관객들은 작품 자체 보다는 작품과 작가, 전시장과 감상자 자신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보는 미술 작품이 총체적 세계인 마크로코스모스 (μακρόκοσμοϛ)를 구성하는 복합적인 요소들 중의 일부, 또한 한 단면에 불과한 것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확산된 때문이다.
<디지털 이클립스>를 ‘바라보려는’ 관객은 먼저 전시장 한쪽 모서리에 서거나 벽을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데, 작품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이러한 태도는 곧 허물어지고 만다. 끝에 금속 추를 달아서 길게 드리운 흰 줄들로 만들어진 스크린은 사람들이 곁을 지나감에 따라서 가볍게 파동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서 그 위에 투영되는 태양의 영상 또한 가볍게 흔들린다. 또한 스크린 앞에 다가선 감상자는 영사기를 등진 자신의 그림자가 또 다른 일식을 만들어 내는 것을 경험하게 되며, 이러한 자극에 끌려서 좀더 적극적으로 상황을 연출하려는 이들은 영사기 앞을 지나치는 자신의 움직임 또한 전시장에 퍼지는 음향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단순한 음향과 느린 속도로 변화하는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관객은 자신의 움직임이 불러일으키는 변화를 생생하게 인식하게 마련이다.
2002년 이후 하원의 작업에서는 이처럼 관객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려는 의도가 증대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는데, 종이로 주형된 나무 둥치나 잎사귀 등을 투명한 상자에 넣어서 반복적으로 나열하던 초기 작업과 구별되는 가장 큰 변화는 오브제를 주인공으로 삼아서 ‘공간’을 연출하는 대신에, 소리와 이미지로 관객이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작가의 행위를 억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간이 결정된 것이 아니라 관객에 의해서 전개되도록 하는 이러한 태도는 작가 자신이 밝힌 의도대로“작품에 관객을 끌어안고자”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나무, 잎사귀, 그림자, 바람 등과 같이 자연적 소재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나, 젖은 닥지를 이용해서 일일이 손으로 떠내던 섬세한 작업 방식은 현재의 작업에서도 일관되게 반영되고 있는데, 디지털 영상 매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는 한지를 조각조각 붙이거나 깃털을 촘촘하게 이어서 영사막을 만드는 등 수공예적인 경향이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규모가 확장되면서 작품은 이제 바라보아야 할 물체로부터 그 안으로 들어가서 거닐어야 할 환경으로 전환되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숲과 강물의 영상을 느린 속도로 재현하면서 점멸하도록 했던 2002년의 개인전 <시간의 자리를 맴돌다> (금호미술관)나, 깃털로 만들어진 커다란 막 위에 붉은 태양이 중심점으로부터 나타났다가 다시 소멸되도록 한 2002년 작업 <숨> (2002; 마로니에 미술관), 그리고 두 대의 모니터에서 들판과 물가의 풍경이 드러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게 만든 카메라 옵스큐라 작업 <사이 極-極> (2004; 성곡미술관) 등은 연극의 무대 배경화인 스케노그라피아 (skenographia)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다. 배우들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총체를 이루게 되는 스케노그라피아와 마찬가지로 하원의 작업은 격리된 대상물이 아니라 관객이 경험해야 할 존재인 동시에 마크로코스모스의 한 단면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다면 <디지털 이클립스>의 공간에 있어서의 배우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작가와, 그가 조작해 낸 인위적인 일식 현상을 체험하는 관객들은 서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관객들 가운데 어떤 이는 작가의 의도를 간파하려 애쓰고 또 다른 이는 자신만의 개인적인 체험을 떠올리기도 한다. 또한 누군가는 강렬한 색채의 붉은 해와 푸르스름한 일식 위에 떠오른 자신의 세련된 그림자에만 관심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스스로가 소리와 빛의 반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스쳐 지나갈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스크린을 한 겹 한 겹 투과하면서 점차로 약해지다가 반대편 극점에 있는 자신의 그림자와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태양의 이미지 한 가운데 서 있는 관객의 체험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세심하게 환경을 통제하고 관객에게 자극을 보내고 있는 작가의 행위와 연결되면서 서로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로부터 시작해서 이 수많은 운동화 끈들을 어떻게 프레임에 매달 수 있었을까 하는 단순한 궁금증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유가 가능한 하원의 이번 전시는 미술 작품에 있어서 어디까지가 작가의 몫이고 어디까지가 관객의 몫인가, 그리고 작품과 작가, 관객이라는 세 요소의 상호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라는 미술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게 하고 있다.

 

조은정 (미술사)

 

 

 

실재와 가상의 틈


하원의 동영상 설치작업

 

한 동안 종이캐스팅으로 떠낸 나무토막이나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낸 나무 이미지 연작을 통해 존재의 ‘실상과 허상’에 대한 물음을 꾸준히 제시해온 하원이 이번에는 그 표현방법을 디지털 이미지로 확장시켜 영상설치 작업으로 개인전을 꾸몄다. 매체의 확장이란 작가가 다루는 표현 도구나 방법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작가가 추구하는 예술관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라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작가의 예술관은 다양한 표현매체에 의해 연마됨으로서 보다 든든한 결실을 맺기도 한다. 사실 오늘의 청년작가 세대는 과거의 어느 때 보다도 평면과 입체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다양한 미디어를 채택할 것을 요청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작가들은 자신의 작업에 공간의 문제와 함께 시간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도 한다.
하원의 종이캐스팅 작업과 영상설치 작업 사이에는 일관된 하나의 화두가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존재의 실상과 허상을 둘러싼 물음과 그 조형적 실현’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미술의 영역에 있어 실상과 허상에 대한 물음은 모방의 개념과 함께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사물의 껍질인 일루젼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캔버스의 물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모더니스트에 이르면서 개념의 변화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아직도 존재의 시지각적 본질에 대한 질문은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의 의미를 인식하는 방식은 특정의 이념이나 형식에 의해 완결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시대에 따라 새롭게 규정될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입체주의 작가들에 있어 지각된 존재의 의미는 사물의 ‘해체와 조립’의 과정에서 밝혀지지만 초현실주의자들에게 그것은 ‘꿈과 현실’ 사이의 틈을 주시하는 것에서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하원이 시도하는 일련의 작업은 현대인의 지각방식이라 할 어떤 메커니즘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첨단의 정보 미디어가 일상을 지배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작가의 작업은 디지털 이미지의 본성인 ‘단위와 조합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쇄된 이미지가 망점의 집합이라면 디지털 이미지는 비트의 순열에 의해 그 정체가 규정된다는 점이 이를 대변한다. 이미지의 구조에 관심을 두고 있는 하원의 작품은 따라서 주제에 대한 서술적인 나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작가가 선택한 주제로서 풍경은 ‘실재와 가상’ 이라는 두 개의 이미지 사이를 오가는 지각체계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적 기능을 우선적으로 지니고 있다. 실재 이미지가 무수한 사각 면으로 추상화되는 과정에서 우리의 시각은 디지털 영상 이미지의 가상적 속성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개인전에서 하원은 두 개의 동영상 설치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이 전시회에 <시간의 자리를 맴돌다>라는 제목을 달아 놓았는데 이는 작가가 시간의 흐름과 그 반복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우선 첫 번째 전시실에 들어서면 좌우 벽면과 전시장 중앙에 각각 설치된 세 개의 대형 스크린을 대하게 되는데 화면 모두에는 잎사귀가 바람결에 물결치는 가벼운 숲의 이미지가 투사되고 있다. 걸음을 멈추어 서서 화면을 자세히 바라보면 나무 이미지는 디지털 조작에 의해 천천히 해체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거대한 사각의 색면으로 환원된 이미지만이 남게된다. 각각의 스크린 이미지는 이러한 실재 풍경과 기하학적 도상 사이의 순환적 과정을 역으로 보여주며 앞의 화면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전시장 안을 거니는 도중에 관객은 프로젝터에서 발사된 빛에 의해 자신의 그림자가 비추어진 화면 앞에 서게 되기도 하며, 이를 통해 숲의 변화하는 이미지에 관객을 간섭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보게 한다. 그밖에도 주목되는 부분은 스크린에 전체에 부착된 사각의 트레이싱 페이퍼들인데 이것들은 관객이 이동하면서 발생시키는 바람에 의해 미세하게 출렁이며 화면 속에서 팔랑이는 나뭇잎들의 움직임에 심리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다시 걸음을 안으로 옮겨 두 번째 전시실로 들어서면 이번에 보이는 것은 오른쪽 벽면 전체에 투사된 바다 이미지와 전시장 바닥에 횡대로 배치된 24개의 텔레비전 모니터들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앞의 작업에서와 같이 전체 이미지를 사각의 마디로 분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물결이 이는 바다 이미지를 담은 화면은 24개의 단위로 나누어 벽돌처럼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이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으며 매 초마다 하나씩 차례로 사라졌다가 다시 원형으로 조합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한편, 벽면 이미지와 분리된 채 바닥에 설치된 모니터들은 앞서 말한 24개의 단위들을 하나씩 담고 있으며 바다 이미지의 구축과 해체의 반복적 순환의 과정을 온(ON)과 오프(OFF)의 이진법으로 뒤따르고 있다. 한편, 전시장에는 모니터 사이를 지나는 회로들 그리고 단절의 음절을 알리듯 규칙적으로 점멸하는 스위치의 철걱거림이 공간을 진동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이 기계적 조작의 영역에 서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상에서 본 두 영상 설치작업에 나타나는 공통점은 앞서 말했듯이 디지털 이미지의 본질이라 할 ‘단위와 조합의 구조’에서 발견된다. 자연 이미지와 순수 색면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거나, 아니면 이미지의 조합과 해체 과정을 단계적으로 반복함으로서 작가는 자신이 추구하는 실재와 가상 사이를 맴도는 시각체계의 매커니즘을 예술적 방법으로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질문하게 된다. 작가가 시도하는 디지털 이미지의 구조에 대한 관심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의 반복은 작가가 속해있는 문화 사회적 정황이 작가의 예술관과 어떠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를 따져보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물론 작가의 몫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디지털 매체가 지배하는 현대적 삶에서 우리의 가치관이나 지식은 프로그래밍 된 정보에 의해 확립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작업이 이러한 가상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혹은 대응의 과정으로 파악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작업 앞에서 현대성의 다양한 특성으로 꼽히는 디지털 미디어, 가상 현실, 정보 이미지, 스펙터클 등의 개념을 떠올리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실상 이미지가 화면 위에서 기하학적 코드로 변화되고 있는 과정을 재현적 사실주의에서 비대상적 추상의 세계로 이동하는 모더니즘 미술의 폭력적 역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미풍에 떨리는 나뭇잎의 숲이나 세월을 보내듯 무심히 흐르는 바다의 서정을 섬세하고 세련된 조형언어로 보여주는 작가의 예술적 감각에 잠시 기대어 명상의 시간을 가져도 즐거울 것이다.◎

 

김영호(중앙대교수, 미술사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