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이기칠의 개인전 <그림연습>이 11월말부터 5주간에 걸쳐서 대구 갤러리분도에서 벌어진다. 이기칠 작가는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조각가 중 한 사람으로서, 건축으로부터 착안한 조형 이미지를 매우 절제된 형태로 드러낸 미니멀리스트이다. 경북대학 조소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이기칠 작가는 자신이 조소 작업에 접근해 왔던 방식을 타 장르 예술에서 그대로 실천한다. 그의 무에서부터 숙련을 쌓아간 이 작업은 몇 해 전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에서 드러났다. 그는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해 피아노 교습을 시작했고, 끝없는 연습 끝에 전곡을 완주한 다음 그 결과물을 영상에 담아 자신의 조각 작품과 공간 배치한 작업을 선보인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회화다.
전시제목이 가리키듯이, 이 전시는 조각가 이기칠이 공개하는 회화전이다. 기존의 작업을 빼고 순전히 회화로만 채운 전시리스트는 그가 시도하는 새로운 실험 내지 도전이다. 그가 그리는 원칙 또한 특별한데, 이 전시에서 그는 회화사에 존재를 기록한 명작들을 최대한 똑같이 그린 작품을 공개한다. 그는 지적재산권을 기준으로 사후 70년 이후가 된 화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선택한 그림들을 연습하듯이 캔버스에 그려왔다. 이 프로젝트는 구상은 이전부터 배태되었으나 갤러리분도에서 개인전이 확정되던 시기에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시 1년 전부터 그리기 연습이 진행되며 매우 많은 양의 그림을 동시다발로 완성시켜왔다. 50호 캔버스로 한정한 화폭에 일정한 붓질로 재탄생한 이기칠의 회화는 원본이 존재하지만 이기칠의 작업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신작이다.
본 전시 <그림연습>에서 선보일 작품은 갤러리 관계자를 포함하여 소수를 제외하고는 아직 비공개 상태로 있다. 한 편 작가의 이번 전시에 관한 제한된 정보가 확산되면서 조각계엔 작은 소란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예컨대 이기칠 작가의 본 전시가 조각의 회화에 대한 항복 선언으로 비춰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작가의 지난 작업 이력을 보면 이 도전적인 시도는 그리 놀라운 사실도 아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결정과 실행의 힘 자체가 놀랍다. 작가의 경이로운 창작욕과 더불어, 갤러리분도의 1,2층 공간을 모두 점유하는 회화의 재탄생은 그 원본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것과 비교하는 재미 또한 관객들에게 제공할 것이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
Criticism
모두가 주목할 만한 연습
본 편을 터트리기 전에 예고편을 흘리는 것은 예술과 문화산업의 기획에서 당연한 일이 되었다. 결말이나 극적인 장치가 드러나면 곤란하겠지만, 어느 정도의 정보가 제공되어야 기대 대비 만족도가 커지는 법이다. 여기 이기칠 작가의 전시는 많은 정보를 숨긴 채 준비되었다.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니다. 최초의 착안으로부터 본격적인 준비와 완성에 이르기까지 필요했던 지난 두 해가 너무나 서둘러 지나가버린 탓이다. 어떠한 언로를 통해서라도 그의 신작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고 궁금증을 풀어주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다. 작가를 포함하여 이 일에 가담해 온 우리는 관람자들의 반응이 매우 궁금하다. 이기칠의 새로운 개인전은 새롭더라도 너무 새로운 전시이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조각가 이기칠이 화가 이기칠로 다시 태어나는 선언이다. 조각 작품이 놓였어야 할 공간에는 그림만 가득히 벽에 걸렸다. 아무 사전 정보 없이 갤러리를 찾은 그의 지인이라면 적잖이 당황할 법도 하다. 전시 제목이 <그림연습>이다. 제목이 왜 이럴까? 방금 썼던 내 표현처럼 이 전시가 선언이고, 준비 과정이 실험이라면 거창한 타이틀을 달았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그냥 그림을 연습한 것이라고 한다. 그림그리기 연습은 어린 아이들도 한다. 그리기 놀이도 있지만, 노는 것과 연습하기는 좀 다르다. 연습은 개인이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방법을 익히고 그 속에 담긴 문화를 깨우치는 사회화 과정이다.
뭐든 처음은 불편하다. 조각가로서 그는 조형의 기본적인 표현법은 마땅히 손에 익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게 펜을 써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과 회화 작품을 완성하는 일은 별개의 일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 전시를 준비하는 최초의 단계에서 이기칠 작가의 회화 작업은 몹시 뻣뻣했을 것이다. 현 시점에서 그의 회화 실력은 당연히 숙련도가 붙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병행하는 그는 휴일과 여가시간과 방학을 일상에서 지워버렸다. 쉼 없이 이어진 작업 시간을 보내며 그가 바뀌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이것은 인간승리다. 하지만 화단에는 날고 기는 무수한 능력자들이 있다. 그들이 지금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투여한 시간과 작가 이기칠이 캔버스를 마주한 일 년 남짓한 시간의 차이는 굉장하다. 그래서 이 기간은 연습이라 불러도 된다. 지금으로부터 좀 더 지난 어느 시점에 이르러 화가 이기칠의 화풍이 뚜렷한 회화적 성취를 이루었을 거란 말을 작가 본인의 입으로 하는 건 다소 어색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관찰자인 나는 그 단계의 도래를 확언한다.
작가는 현 단계의 설정부터 아주 치밀하게 준비하고 실행했다. 그것은 매우 영리한 결정이다. 이번 작업의 주된 원칙은 화가로서의 오리지널리티를 작업에서 배제시킨 일이다. 그는 자신이 보기에 회화의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로 읽히는 그림들을 베껴 그린다. 어떤 그림을 선택할지는 전적으로 본인의 주관적인 결정이다. 대신 거기에 자신만의 해석이나 변형이 들어가는 일은 없다. 이건 무미건조할 만큼 객관적인 실행이다. 자기 해석 과정을 뺀 이 원칙 자체가 역설적으로 특별하단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아, 단 한 가지 빼고. 두 번째 원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화폭 안에 몇 점의 레퍼런스를 겹쳐 그리는 시도겠다. 오래된 과거부터 가까운 과거의 작품이, 서양화와 동양화가 뒤섞인 이 원칙에 관하여 나는 궁금했다. 현실적으로는 전시공간 내 위치선정까지 고려할 때, 나는 그 작품들의 순서에 작품 발표년도 같은 패턴이 담겨있는지 작가에게 물어본 바 있다. 만약 있다면 그건 허술한 기획이 될 우려가 있다.
세 번째 원칙은 온전한 전시를 위한 리스크 관리를 염두에 둔 선택이다. 그는 지적재산권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후 70년 이상이 된 화가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올해 기준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950년 이전에 작고한 작가들 그림이 여기 다시 등장한다. 그림들은 이기칠 작가가 형태를 재현하고 색을 지정한 이후 본인과 그의 보조자들이 채색을 거듭해 완성되었다. 주로 오십 호 크기의 캔버스로 통일된 작품은 일정한 필법과 톤을 지켜가며 포드주의 시대 대량생산되던 공산품에 비유할 정도로 양을 불려왔다.
이렇게 세상에 나온 그의 작품은 호불호의 취향을 탈 것 같다. 한국 현대 조각계에서 비중 있는 작가로 활동해 온 그가 벌이는 기획은 한 편의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지닌 전력을 보면 이게 그리 놀랍지 않다. 이 모든 게 연극 무대에서 1막 2막 3막으로 진행되는 예술가의 생애다. 그 누가 등 떠밀어 올라온 게 아닌, 본인이 펼쳐가는 그 무대의 주제가 연습이다. 그가 벌여온 연습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전곡을 연주하는 결과로 공개되었다. 바이엘과 체르니를 거쳐 정석의 기교를 쌓아가는 연주자의 길 가운데, 이기칠 작가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는 목적을 향해 자신을 집중했다. 물론 음악을 좋아하지만 건반을 다룰 줄 몰랐던 그가 몇 년에 걸쳐 분투한 결과는 영상으로 기록되었다. 그 영상은 때로는 단독의 작품으로, 어떨 때는 자신의 조각과 더불어 공간에 배치되었다. 그 시도가 연습 프로젝트의 본격적인 출발이었다.
연습 프로젝트의 서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유를 따져보면 그가 조소 작업도 연습과 같은 과정을 밟았기 때문이다. 그가 틀을 갖춘 입체 조형은 특정한 대상의 재현보다 추상에 가까웠다. 하지만 작업의 기조는 개념 미술로 볼 수도 있었다. 장식과 과잉을 제거하고 최대한 단순한 조형 형태를 만든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블록과 같은 조각 작품을 가능한 많이 만들어내는 기준, 즉 생산성을 목적으로 두지 않는 예술 행위였으니까 망정이지, 어쩌면 이기칠 작가는 초창기 경영학에서 길브레스 부부가 했던 망상에 가까운 시간-동작 연구(time and motion study) 같은 교범을 개발해서 완성 단계에 이르는 최적의 조건을 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는 역설이 따른다. 작가는 자신이 그렇게 제거하고자 했던 예술의 요소를 그림 그리기에 다시 불러들인다. 작가가 중심에 뒀던 본업에서 벗어난 연습 대상은 그에게 해방감만큼이나 책임감을 새롭게 안겼다. 반복해서 밝히는 사실이지만, 그는 자신이 본 딸 그림을 평소에 특별히 좋아하거나 영향 받은 목록 중에서 가지고 온 게 아니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표준화된 공정으로 완성에 이르는 작품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이 늘어나면서 컬렉션의 특성이 어렴풋하게 드러났다. 작가의 말을 전하자면, ‘연거푸 하다보니까 선호하는 화가와 화풍이 있었다’는 것이다. 최초로 손을 댄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부터 그랜트 우드(Grant Wood)가 그린 아메리칸 고딕 같은 그림을 보라. 공간을 가득 채운 그림들은 중세 이전부터 콘템포러리 아트의 여명기에 이르는 회화사의 단면이라 해도 좋다. 물론 우리는 안다. 원본이 된 그림들과 이기칠 작가가 재현한 그림은 전혀 다른 감상법을 가진다. 어쩌면 다음에는 딴 식으로 흘러가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 대규모의 모사 프로젝트는 앞선 시대의 화가들에 대한 경의일까? 아니면 짓궂은 도구화일까? 뭐든 좋다. 그의 진지하지만 동시에 강박적인 삶의 전환 앞에 굉장히 중요한 연습이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