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a Collection
서양화가 이진용의 초대전 <메타 콜렉션>전이 갤러리 분도에서 열린다. 같은 장소에서 2012년에 열렸던 <쓸모 있는 과거>, 2015년에 열렸던 <5015. 158. 43>에 이어 세 번째로 벌어지는 개인전 <메타 콜렉션>은 그가 작년 후반기부터 새로운 구상으로 시작한 작업을 공개한다. 이 신작은 펭귄 출판사가 펴낸 책을 그린 회화로, 굉장히 오래된 빈티지 북을 대상으로 한 작품들이다. 이진용 작가는 자신이 수집한 희귀물품들을 본인의 작품에 끌어들이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국내외 전시나 여행을 목적으로 방문지에 갈 때마다 그 지역의 빈티지 가게들을 사전 조사하고 수소문해서 찾아 다녀왔다. 그곳에서 그는 여러 가지 물건을 구해서 돌아왔는데, 그렇게 수집한 물건들의 종류나 양은 굉장히 많을뿐더러 그 가치 또한 크다. 그것들은 이번 전시의 주제가 된 오래된 책에서부터 시계와 완구류, 차와 다기류, 가방이나 문구류, 화석과 도자기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작가가 벌이는 전시는 이 물건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회화작품으로 등장시키기도 하고, 틀 속에 넣고 레진으로 굳힌 독립된 연작으로 공개되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에 그것은 직접 설치작품처럼 놓여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되기도 한다.
분도에서 있었던 첫 번째 전시 <쓸모 있는 과거>에서는 가방과 도자기 콜렉션을 화폭에 옮긴 회화작품과 레진 연작을 주로 선보였다. 3년 뒤 <5015. 158. 43> 전시에서는 캐스팅한 낱개 조각에 한지를 입히고 붓으로 활자체를 그린 무수한 가상의 활자본들을 부조 형식으로 완성한 작업을 공개했다. 엄청난 시간과 자본과 노력이 투여된 활자 연작은 인류의 문명사와 작가의 개인사를 연결한 기획으로 시도된 바가 있다.
이번에 새로 벌어지는 <메타 콜렉션> 전시에서는 빈티지 펭귄북스를 소재로 삼은 신작회화 이외에도 기존의 작업 중에서 레진 연작도 함께 공개된다. 레진 연작은 올해 상반기에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반복과 차이>전에 출품되었던 작품들과 이후 새로 완성한 작품들 가운데 선별된 것들이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
Criticism
메타 콜렉션 : 펭귄북스
평론의 정상적인 성격을 벗어난 이 글에서, 먼저 필자인 본인 이야기부터. 내가 펭귄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Penguin Books)을 알게 된 건 대학생이 된 다음이었다. 그 시절은 한국에 그 책들이 번역되어 출판되기 전이었다. 칼 맑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서, 예컨대 자본론, 정치경제학 수고, 문명 속의 불만, 꿈의 해석 같은 책을 읽고 있노라면 번역자가 주석으로 달아놓은 설명에 “펭귄 출판사 판본”이란 글귀가 종종 눈에 띄었다. 잘 모르지만 펭귄출판사는 굉장히 오래되고 심오한 학술서적들을 가려서 찍어내는 출판사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박혔다. 그건 전부 사실이 아니었다. 펭귄북스는 1930년대에 영국 런던에서 출발했으며, 엄청나게 폭넓은 분야를 다루는 출판사란 걸 알게 되었다.
헌 책방에 어쩌다 한 꾸러미씩 나오는 주황색 영문판 소설도 이 출판사 책이란 것 또한 알게 됐다. 클래식 음악계에 도이치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 음반사가 있다면, 출판계엔 펭귄북스가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모든 장르를 평균 이상의 고른 수준으로, 또 새로운 판본으로 비싸지 않게 찍어내는 건 두 회사의 공통점이다.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되어버린 펭귄의 도상과 함께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새 표지로 공개되는 이미지는 그 자체가 미술이다. 오래되어 낡은 펭귄의 책들은 전문 수집가들을 만들었다. 그냥 책을 사서 모으기 좋아하는 애서가들이 아니라 펭귄출판사의 책들, 더구나 누렇게 변색되고 표지가 너덜거리는 빈티지 펭귄북을 모으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 취미가 나로서는 다가설 수 없는 경지다. 나는 낡은 운동화도 신을 수 있고, 빈티지 와인도 마시면 되지만, 내게 오래된 책은 다른 대체재가 흔할뿐더러 사용가치가 낮은 유물 같다. 그 점이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압도하는 물건인 모양이다. 어쩌면 화가 이진용이 펭귄북스에 빠져든 건 당연한 일 같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를 펭귄북스 콜렉터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에 관해서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는 여러 고서적을 비롯해서 가방과 도예품과 시계와 기념품, 그리고 문구류와 장난감과 액세서리, 또한 내가 아직 모르거나 미처 못 본 종류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종류와 분량을 모은다. 이 중 어느 한 가지만 모았더라도 집안 기둥뿌리가 뽑힐 지경인데, 방대한 양과 질은 그의 라이브러리를 목격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것들을 여러 채의 집에 나누어 놓을 수 있는 자산은 또 다른 차원일 터이고.
그가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모은 물건들은 그것이 제작된 시간과 공간을 이곳으로 전한다. 전달 방법은 역시 회화다. 그는 묘사력이 뛰어난 화가다. 당연히 이진용 작가의 그림은 사실주의에 바탕을 둔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나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작가가 지닌 그런 언술을 허세라고 생각했다. 이번 전시에 앞서 같은 장소에서 삼사 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졌던 두 번의 개인전을 치르며 나는 그렇게 봐 왔다. 이제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작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해서도 알게 되었다. 많은 작품에서 그의 그림은 보통 정물화가 그런 것처럼 배경을 두고 그 가운데 대상을 놓아두는 정석을 따르지 않는다. 가방이면 가방, 책이면 책, 그것만 화면에 가득 채우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얻어지는 즉물성은 그 그림들을 벽면에 빈틈을 많이 두지 않는다면 더 부각된다. 그 스펙터클은 어떤 면에서는 팝아트의 프론티어들이 공산품을 집적해놓은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또 다른 면에서는 비슷한 색조와 구조가 사방으로 확산되고 돋보기를 갖다 댄 듯 세밀한 입자의 얼개가 추상화의 반복성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진용의 회화는 당연히 그 무엇도 아니다. 극사실주의도 아니고 팝아트도 아니고 추상화는 더욱 아니다. 그냥 이진용의 회화다. 이진용의 회화가 뭔데? 난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그는 자신이 매료당한 물건을 입수한다. 구입한 물건을 이미 쌓인 목록에 더 한다. 그 더미 혹은 낱개의 대상을 응시하며 감흥을 체험한다.
캔버스 앞에 앉은 그는 머릿속에 재해석된 대상의 실체와 감정을 결합시켜 그림으로 드러낸다.
그 결과로서의 산출물을 보든지 그 과정을 보든지 어느 관점에서든 이진용의 작업은 압도적인 예술이다. 동시대 미술이 저마다 기발한 개념을 세우고, 독창적인 시각 효과를 창안하고, 사회적 의제를 공유하는 식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매기려 한다. 이진용은 전혀 다른 경로에서 그 가치에 접근하고 있다. 나는 그만의 독특한 작업 과정을 메타 콜렉션(meta collection)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수집을 수집하기, 이 세계를 관찰한 결과를 관찰하기, 모아서 쌓아둔 것들을 관찰해 그린 그림들을 쌓기. 그가 벌이는 2차적 질서의 관찰을 보고 있노라면, 작가가 그림 그리는 일에 빠져서 헤어나질 못하는 게 보인다. 이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작가 경력이 그만큼 된 화가들에게 그림은 일상 업무이며 숙제이며, 아무리 좋은 말로 꾸며봐야 고행이나 수행일진데, 이진용은 그리는 일을 여전히 재미있어하는 모습이 경이롭기도 하다.
작가는 갤러리 분도에서 벌인 첫 번째 전시 <쓸모 있는 과거>에서 가방과 도자기를 그린 회화를 선보인 바 있다. 그 뒤에 다시 벌어진 개인전 <5015. 158. 43> 전시는 인류의 문명사와 작가의 개인사를 숫자로 셈한 제목을 달았다. 그 기준에 준거한다면 이번 전시가 5018, 162, 47이란 타이틀을 달아도 무방했다. 캐스팅한 낱개 조각에 한지를 입히고 붓으로 활자체를 그린 무수한 가상의 활자본들을 부조 형식으로 완성한 작업은 그때 처음 공개되었고 이진용 작가의 대표 연작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다시 책을 전면에 내세우며 과거의 작업을 되새기고 있다. 또한 첫 번째 전시와 올해 초 부산에서 벌어진 <반복과 차이>전에서 각각 공개되었던 레진 연작도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전시가 <5015…>전보다 퇴보한 걸까? 그럴 리가. 그는 새로운 목록을 자신의 세계에 편입시키며 자신의 성을 더 높고 유려하게 쌓고 있다. 그 새로운 목록이 옛날에 이 세계를 지탱했던 일부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과거로 회귀할수록 미래의 예술로 더 나아가는 역설의 아름다움은 여기서 실현된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