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同床異夢
현대미술가 이지현 작가의 개인전이 갤러리 분도에서 열린다. 경기도 파주에 작업실을 두고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가 대구에서 개인 자격의 전시를 여는 것은 2년 전 봉산문화회관 유리상자 특별전 이후 오랜만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실재 책과 옷을 뜯어 보풀을 만들어 새로운 이미지로 바꾸는 그의 전매특허를 보여준다. 중앙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이지현 작가는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전통적인 그리기 방식에서 벗어나서 오브제를 한 올씩 뜯어서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통하여 국내외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려왔다.
그가 미술계에서 명성을 쌓은 것은 책 연작을 통해서이다. 부친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성장기부터 책에 둘러싸인 환경에 익숙했던 그가 책을 작업의 중심에 놓은 것은 운명과 같은 동기였다. 작가는 비교적 가공이 쉬운 종이의 특성을 이용하여 책이 가진 외형은 유지한 채, 표면의 질감을 전혀 새로운 상태로 바꾸어 ‘훼손의 아름다움’을 실현해 왔다. 그가 시도하는 오브제는 책에 국한되지 않고 스케일이 큰 전경 인스톨레이션과 같은 실험 작업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공개되었다. 그를 대표하는 책 연작과 더불어 그가 몇 해 전부터 새로 시도하고 있는 옷 작업도 이번 갤러리 분도의 개인전에서 공개할 계획이다.
그가 벌이는 의류 연작은 초기 단계에는 어떤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기증받은 헌옷가지를 가공하여 전시하는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의류의 수집과 전시에 이르기까지 서구 미술의 아르테 포베라 사조로 해석도 가능한 그의 옷 작업은 이따금씩 유명인사들의 옷을 소재로 쓰며 화제를 낳기도 했다. 이지현 작가의 옷 작업은 이번 전시를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갤러리 분도 박동준 대표가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하던 시기에 남긴 의상을 이지현 작가가 미술작품으로 재가공한 결과를 보여주는 게 그것이다. 이번 전시는 한 공간에는 가상의 여성 의상 부티크가 연출되며, 또 다른 공간에는 가상의 서재가 재현된다. 이는 비유와 풍자 혹은 냉소 등의 요소가 아닌 그 물건 자체의 노동집약적 변형 또한 동시대 미술의 한 가지 시선임을 많은 사람들 앞에 증명할 기회이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
Criticism
사물의 또 다른 상태
몇 년 전에 이지현 작가가 지금까지 해오던 작업과는 다른 작업을 보여주겠다는 소식이 퍼졌을 때 다들 그게 어떤 것일지 기대를 하면서도 좀 의아스러워 했다. 그때까지 잘 진행해왔고, 그로 인해 작가가 명성을 쌓을 수 있었던 책 연작을 놔두고 뜬금없이 옷 시리즈라니. 그 재생성의 현장에 내가 있었다고 하면 괜한 자랑일까. 하지만 선생은 이미 그전부터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책을 소재로 한 연작 에 이어 옷을 이용한 신작 를 구상하며 양 갈래의 작업을 사브작사브작 진행하고 있었다. 영천 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한 그의 방을 내가 처음 찾아갔을 때 넓은 작업실에는 테이블과 접이식 침대, 작업에 쓰는 렌치 하나, 스니커즈 두 개만 달랑 있었다. 그리고 몇 달 사이에 방에는 엄청난 양의 옷이 쌓였고 그것은 책 연작과는 비슷한 듯 다른 작품이 되어가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난폭하고 무례하고 그렇지만 동시에 내밀한 그의 오브제 해체 작업은 형상이 그 물체가 가진 성격만을 남기는 추상성을 향하고 있다. 그의 작가적 생애에서 신작에 해당하는 옷 연작이 기존의 책 연작과 경계를 그으며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것이야말로 멀쩡한 물건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는 작태다. 또 다른 식으로 보면 작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그것들이 과연 무슨 책이었고, 누가 입었던 옷인지 상상력을 발동시키기도 한다. 그런 점을 놓고 보면 이지현의 작업은 다분히 현실로부터 시작되었고, 거기에서 묶인 채 멀리 벗어난 적이 없다. 한편으로 그의 작품은 원본이 각자 품었던 오밀조밀한 역사가 해체(나는 해체 deconstruction 라는 말이 예술의 여기저기에 필요 이상으로 쓰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서 ‘뜯어서 흩뜨려놓기’ 식으로 쓰는 게 더 마음 편하지만, 여기서는 물건만이 아닌 기호와 의미까지 변질시켰으므로 그냥 해체라는 단어 선택이 더 낫다고 판단)된 다음에 작가의 세계에 매력적으로 편입되고 있다.
이번 전시의 중심에 놓이는 작업은 옷 연작이지만, 순서상 책 이야기부터 하자. 이런 게 있다. 안 읽은 책과 읽은 책은 외형이 다르다. 페이지를 넘겨가며 다 읽힌 책은 때도 타고, 제본이 부풀어 오른다. 이번에야 생각난 일인데, 나는 이지현 작가가 완성한 책 작품을 보며 그것들이 누가 한 번도 안 읽은 책이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다 읽어서 공공재로서 수명을 다한 책이 맞닿은 극적인 운명, 바로 이지현의 책이다. 그는 책이 가진 외형은 거의 유지한 채, 표면의 질감을 우둘투둘하게 망쳐놓음으로써 ‘훼손의 아름다움’을 실현해 왔다. 그는 하나의 단품이 틀을 잡는 것에만 자족하지 않고 더 큰 공간 설치도 종종 실험해왔다. 내가 아는 한 최고의 시도는 2016년에 벌어졌던 대구 봉산문화회관 유리상자 10주년 기념전이었다. 거기서 작가는 책장을 낱낱이 찢어서 정보의 바다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장관을 연출했다. 몹시 주관적인 내 판단이기는 하지만, 그 전시가 좋았던 이유가 뭔지 돌이켜보면 지적 속물주의를 통쾌하게 파괴했기 때문이다.
짐작만으로도 이지현 작가는 책을 주제로 삼은 단체전에 불려 다녔을 법하다. 사실 ‘책 전’, ‘커피 전’, ‘고양이 전’, ‘자동차 전’ 따위의 테마 전시는 개별 작가들이 가진 창작의 자유의지를 틀에 가두어 껍데기만 취하는 저급한 기획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런 전시는 일정한 수요가 있다. 거기서 지적 충만을 대리 체험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런 스노비즘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책을 분해했다. 올을 헤쳐서 읽을 수 없는 책은 마침내 파본되어 제 자리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읽을 수 없는 책, 그것은 곧 폐기나 다름없지만 작가는 그 더미에서 끝내 자기 작업의 원리를 확증시켰다.
그리고 옷 이야기. 기성품으로 나온 옷을 예술 작품의 소재로 삼는 일은 미술에서 흔한 일이 되었다. 그 의류에 담긴 시니피앙을 끄집어내어 옷가지들을 가지런히 두고 설치 미술로 봐달라는 뻔뻔함은 동시대 미술의 한 가지 태도다. 따지고 보면 옷을 고르고 그것을 조합해서 갈아입는 우리의 행위도 자기 삶을 바탕으로 미적인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되지 않나. 그렇다면 우리들 누구나 예술적인 실천을 매일 하는 셈인데, 이게 예술가와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 구분을 할 때 논쟁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이지현 작가가 벌이는 현대미술에는 그와 같은 논쟁거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적극적인 노동이 끼어든다. 손기술과 끈기와 조형 감각이 그 과정을 이루는 요소다.
그가 해체와 변형을 가하는 옷들은 초기 단계에는 한 지역 주민들로부터 기증받은 헌옷가지였다. 평범한 재료를 구하여 특별한 의미를 낳는 작업은 서구 미술의 어떤 맥락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예컨대 아르테 포베라의 강령을 따를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곤란하다. 또 하나의 작업군인 책 연작을 함께 놓고 볼 때, 누군가가 시비를 걸면 반드시 걸리는 논리적 오류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생의 작업은 이번 전시를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전시가 벌어지는 갤러리 분도의 박동준 대표가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남긴 작품 의상을 이지현 작가가 해체한 배경 때문이다. 작가의 의도는 이번 전시의 표제인 <동상이몽 同床異夢>에서 드러난다. 박동준과 이지현, 두 예술가는 같은 옷을 입고 다른 꿈을 꾸는 셈이다. 한 명은 그 옷들을 만들었고, 다른 한 명은 옷을 해체했다. 미술가는 옷을 조각조각 떼어서 한올한올 변형시킨 다음에 디자이너가 그랬던 것처럼 옷을 다시 만들었다. 그 과정을 우리는 작가 본인이 아닌 이상에 속속들이 알 수 없다. 하지만 작가는 작품을 완성해가면서 디자이너 박동준이 내디뎠던 영예로운 순간을 줄곧 떠올렸을 것이다. 서로 다른 꿈으로부터 나온 실체는 dreaming clothes에서 한 발 더 내딛은 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책과 옷을 아우르는 모든 이미지는 질서를 갖춘 채 분명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할까? 설마 그럴 리가. 그의 예술은 형언하기 어려운 몽상의 흉터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