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12회 최상흠 개인전 18일까지 대구갤러리분도 전시 ‘물감을 풀다’ 테마 10여점 선봬 물감+아크릴물감+경화제 혼합 신비한 색의 파장·덩어리 형상화
‘색을 짓다, 빛을 품다’.
갓 출시한 대형 평면TV의 화면 같은 작품은 오묘한 색상과 손자국 하나 없는 매끄러운 질감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더욱이 작품이 기계적인 공정의 산물이 아니라 작가가 방독 마스크를 착용하고 레진몰탈과 합을 맞춘 지난한 작업의 결실이라는 데서 놀라움은 배가 된다.
대구 갤러리분도가 오는 18일까지 집요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가며 동시대성을 치열하게 탐구하는 최상흠 작가의 열두 번째 개인전 ‘물감(物監)을 풀다’를 연다.
최상흠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그동안 천착해온 건축용 레진몰탈로 개념화되지 않은 색의 비경(秘境)을 탐구하는 ‘멀티-레이어드 레진몰탈 캐스팅’ 일련의 작품 10여 점을 선보인다. 전작들보다 투명도가 높고 변화가 뚜렷해 빛의 파장을 색으로 응집하며 진화하는 작가의 신작들을 한 자리에서 비교 감상할 수 있다.
최상흠의 작품은 재료와 작업방식부터 특이하다. 재료가 물감과 캔버스가 아니다. 붓으로 채색하지도 않는다. 주재료는 건물 바닥 마감재로서 사용하는 레진몰탈. 여기에 색상을 좌우하는 아크릴물감과 경화를 촉진하는 경화제를 섞어서 세상에 없는 비색(翡色)의 물감을 제조한다. 이 물감을 캔버스 천을 씌운 패널에 붓고 헤라로 펴준다. 그러면 레진몰탈 물감은 논에 물이 들어가듯 낮은 곳을 채우며 저절로 편편해진다. 이를 굳힌다. 다시 20~30회 반복해서 레진몰탈 물감을 붓고 굳힌다. 몸피가 두툼해지면서 색이 영롱해진다. 자신이 고안한 레진몰탈 물감과 교감하는 과정에서 레진몰탈은 작가에게 숙제를 던지고, 작가는 시간을 두고 숙제에 답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은 지지체인 패널이 겹겹이 누적시킨 레진몰탈에 묻혔던 전작들과 다르다.
우선, 레진몰탈을 투명하게 사용한다. 혼색하고 겹쳤음에도 색상이 투명해서 어항 속처럼 작품의 내부가 보인다. 다음으로, 지지체도 나무 패널이 아니라 아크릴이다. 투명 아크릴로 제작한 사각의 틀에다가 내부에는 격자 모양으로 뼈대를 넣었다. 그 위에 레진몰탈을 부으면 아크릴 틀의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다. 변화는 더 있다. 전통적인 채색기법인 배채법(背彩法)을 응용해, 아크릴 틀을 뒤집어서 안쪽에도 레진몰탈을 채웠다. 고려 불화나 조선시대 초상화 제작에서 사용한 배채법은 비단이나 종이 뒷면에 채색을 해서 은은한 느낌이 앞면으로 배어 나오게 하는 기법이다.
이러한 변주에 힘입어 이번 작품은 전작과 달리 볼거리가 많아졌다. 특히 두 번째 과정에서 작품은 뜻밖의 조형미로 도약한다. 아크릴 틀 내부에 격자식으로 아크릴을 설치함에 따라 작품이 4~8개의 면으로 구획됐는데, 이것의 의외의 효과를 연출한 것이다. 전작들처럼 불투명한 작품의 곡면은 그대로이지만 내부에 장치한 기하학적 구조로 인해 보는 즐거움이 늘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눈여겨봐야 할 것은 투명도에 따른 빛의 투과율이 높아져서 색감이 밝아졌음이다. 게다가 사각의 테두리 틈에 더해진 색상은 빛이 측면을 투과하면서 미묘한 색상 차를 연출한다. 규격화·개념화된 ‘컬러칩’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비색의 진경을 한껏 누릴 수 있다.
갤러리분도 정수진 큐레이터는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했지만, 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 기존의 색으로 설명도 정의도 되지 않는 것을 결코 회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하며, 십수 년째 빛의 파장을 레진몰탈로 조율하며 신비한 색의 덩어리를 제시한다. 돌이켜보면, 레진몰탈의 세계는 예술계의 일원으로서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한 과제를 풀어가는 화두 같은 작업이다. 그는 채탄장의 광부처럼 레진몰탈의 생리에 귀 기울이며 색의 진경을 채굴하고 있다”고 평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